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빌 (문단 편집) === 중세 === 그렇게 200여년이 흐른 후, 아르벨라는 이슬람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이때부터 아랍/쿠르드 계열의 무슬림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그럼에도 8세기 무렵 아르빌을 중심으로 인근 지방에 5개의 주교구가 추가적으로 설치되는 등 기독교 세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메소포타미의 토착 다신교 역시 10세기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10세기 말엽 아바스 왕조가 분열되며 무주공산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르빌은 쿠르드 족의 한 일파인 하다바니 부족이 세습적으로 지배하였다. 하다바니는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부족이기도 하다. 그러던 12세기, 도시는 [[장기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튀르크인 총독이 통치하였는데 세습되며 베그테긴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12세기 말엽, 그 통치자였던 무자파르 앗 딘은 자발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에 복속하였고 그 대가로 [[살라흐 앗 딘]]의 매부가 되었다. 평화를 누리던 아르빌은 13세기 초엽 쿠르드인 역사가 이븐 알 무스타우피가 활동하는 등 문화적으로 번영하였다. 1233년 아르빌은 세력을 회복한 아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나 곧바로 1237년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도시 대부분이 약탈당했으나 시타델은 함락되지 않았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아르빌의 튀르크 총독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쿠르드 군대는 저항하였고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이듬해 아르빌은 함락되었다. [[훌라구]]는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를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몽골군과 함께 유입된 시리아 정교회의 교회가 세워졌다. 한편 이때 상류층 무슬림들은 시리아로 망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몽골을 피해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여 다마스쿠스의 카디 (재판관)을 역임한 이븐 할리칸이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도들의 중흥기는 14세기 초엽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 기존 이슬람 국가들을 능가하는 탄압 정책을 펴며 종식되었다. 이에 아시리아 인들은 시타델로 피신하였는데 1310년 총독의 요구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쿠르드 인들과의 충돌이 벌어졌고, 7월 1일 튀르크계 대주교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선택한 기독교도 수천명이 학살되었다. 남은 아시리아 거주민들은 1397년 티무르에게 도시가 함락될 때에 학살을 겪었다. 수난을 겪던 아시리아 인들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스만 지도부는 사파비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시타델을 요새화하였다. 1743년, 아르빌은 60여년의 포위 끝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당하였다. 1862년에는 쿠드르 인 귀족이 아르빌을 점거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