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리스토텔레스 (문단 편집) == 생애 == BCE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 그리스어로 Στάγειρα, 영어로 Stageira. 현재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에서 그리 멀지 않다.]에서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 필립포스 2세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할아버지.]의 궁중의 의사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와 어머니 파이스티스 아들로 태어났다. 성씨는 따로 없던 시대라서 이름이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와 어릴 적부터 친구로, 궁정에서 함께 자랐는데 아주 어려서부터 양친을 여의고 프로크세노스가 그의 후견인이었다. 17세 때 [[플라톤]]의 학원 '아카데이아'에 들어가기 위해 아테네로 유학을 와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여년간을 그곳에서 수학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부르며 칭찬했다. 이 시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영특했고 플라톤이 살아있을 때 아카데미아에서 서로 많은 논쟁을 치렀던 모양이다.[* 플라톤이 드럽지만 대화편을 계속 쓰며 학설을 바꿔 나가게 만든 원인 중 하나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과연 학설을 바꾸었는가도 꽤 논쟁적인 주제라 단정적으로 확신하는 건 위험하다.] 이 시기부터 플라톤의 저작을 본딴 대화편들부터 기타 여러 글들을 썼던 모양이나 많은 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소중한 벗이다. 하지만 진리는 더 소중한 벗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원래 전해지는 말은 좀 더 길고 장황한데 중세 시대에 간단하게 정리된 채 전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함께 스승과 학문적으로 결별했으며 누차에 걸쳐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에서 이데아론을, 《정치학》에서 플라톤의 《국가》, 《법률》을 비판한다.] 심지어는 그의 저술 중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그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는 문장이 있을 정도.[* APo. 1. 22. 83a28 참고.] 다만 그가 비판한 것은 주로 중기 이데아론이고, 플라톤의 후기 이데아론[* 이데아의 독립성은 이미 상당히 후퇴한 상태였다. 후기 이데아론은 사실상 현대 분석철학에 가까운 입장으로 물러선 상태였다. 다만 플라톤 사후 신플라톤주의로 계승되어 오랫동안 서구 사상계를 지배했던 플라톤 사상의 기반은 중기 이전의 사상에 기반한다.]은 아리스토텔레스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플라톤이 죽은 직후 아카데미아의 원장이 될 것이라 원생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당시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준비 중이었고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팽배했던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장직을 포기하고[* 아카데미아의 원장직은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물려받았다.] 소아시아의 도시 아타르네우스로 넘어간다. 그곳의 참주 헤르미아스는 아카데미아에서 함께 수학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친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헤르미아스의 이복동생(또는 조카) 퓌티아스를 첫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딸을 낳고 그 이름으로 부인과 같은 퓌티아스를 붙여주며 잘 살아가다가 참주 헤르미아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붙잡여 죽임을 당하자, 고향 [[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로 돌아가 [[필리포스 2세]]의 궁전에 머물면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일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드로스)을 가르친 것은 2, 3년에 불과하다며 둘 사이의 사상적인 영향이 그리 대단치 않다고 보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도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아무런 기록도 없어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통달했다고 주장한다.] 2~3년간의 개인교습으로 제자 알렉산더[* 당시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는 15살이었다. 15살~18살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인교습을 한듯 보인다. 알렉산더는 20살에 왕위에 올랐다.]를 충분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자리를 친척에게 물려주고 BCE 335년, 50살의 나이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아폴론 신전 경내의 공공운동장이던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원 초기에 그는 리케이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오가면서 학생들과 함께 철학을 논하곤 했는데, 이것으로 해서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많아진 뒤로부터는 그도 앉아서 강의를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 제자들의 강의노트이다. 그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어마무시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지만, 현재는 다 소실되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의 저작을 모두 합치면 무려 44만 5,271행이 된다고 말했다. 다만 학자들은 이 수치가 충분히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케도니아인이 아테네에서 설치는 것이 보기 싫었던 사제 에우뤼메돈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가 이전에 지었던 헤르미아스의 죽음을 기렸던 찬가가, 아폴론 신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양식의 찬가라는 이유로, 그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이었다. 이 억지스럽고도 한참 뒤늦은 고발에 은퇴를 결심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원 리케이온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물려준 뒤, 어머니 쪽 고향인 에우보이아의 칼키스(Χαλκίδα)라는 작은 섬나라로 탈출했다.[* 이때 아테네를 탈출하면서, "아테네로 하여금 철학에 두 번 죄 짓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의식한 것. 이야기의 출처는 불명이다.] 하지만 1년 뒤 질병을 얻고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