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리우스파 (문단 편집) ==== 쇠퇴기(378~381)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시기 아리우스파: 로마제국에서의 아리우스파 쇠멸 ==== 아리우스파의 지지자들 중에서는 로마 황제들도 있었으며 한세기 가까이 아타나시우스파와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니케아 신경은 [[구세주]]가 참 하느님이며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자연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무슨 관계인가?'''라는 의문이 지속되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나중에 열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 본질이다"라는 삼위일체론을 일단락지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저 유명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완성하여 발표한다. [[사도신경]]이 더 널리 알려져 있긴 하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사도신경 이상으로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사실 사도신경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축약판에 가까우며, 서방교회에서만 사용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당대에나 후대에나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향후 몇 세기 동안은 '신앙의 완성'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다른 공의회는 없어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 [[현실은 시궁창|물론 이후에도 신학논쟁은 계속 벌어졌다.]] [[경교]], [[단성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성자로부터(filioque) 참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다시 이단으로 선고되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한 신성을 믿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스도교]]가 결국 정통파 교회가 되었다. 아리우스파 신자들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니케아파인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아리우스파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섭정]]인 [[태후|황태후]] 유스티나의 후원에 힘입어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밀라노]] 주교의 임명을 두고 다투던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중재를 맡았던 평신도 [[암브로시우스|암브로시오]], 일명 성 암브로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파의 열정적인 설득에 세례를 받고 1주일 만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면서 아리우스파는 치명타를 맞는다. 암브로시우스는 신학을 연구하면서 차츰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져온 동방 수사학을 통한 논쟁 능력을 이길 수 있었던 아리우스파가 없다시피 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서방교회 내에서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경지에 오른다. 심지어 그의 설교와 논쟁, 이를 통한 설득 능력은 제국 황제에까지 영향을 끼쳐, 그라티아누스 황제까지도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전향시켰으며 그 결과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이전까지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던 최고 [[제사장]] 자리를 포기하고, [[니케]] 상을 [[원로원]]에서 치워버리게끔 했다. 다만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동생이자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인정받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는데, 이는 그의 모후인 유스티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아리우스파 이단으로부터 제국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은 니케아파,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에 의해 사망(383년)하자, 이탈리아의 실권을 잡은 것은 아직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섭정이었던 아리우스파 황태후 유스티나였다. 이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이탈리아 침공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적절한]] 개입으로 저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사망을 기회로 [[니케]]상의 복원을 시도한 이교 원로원 의원 [[심마쿠스]]의 청원을 막아낸 암브로시오는 이후, 유스티나와 격렬히 대립하기 시작한다. 385년, 유스티나는 [[근위대]]가 별도로 예배를 드릴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밀라노 내의 대성당 2곳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당시 서로마지역의 근위대는 아리우스파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아리우스파 부흥이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암브로시오는 이를 거부했고, 군대까지 동원한 징발 시도에 대향해 일반 신도들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치기도 했다. 이에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에게 유배령을 내렸지만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군사적 위협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또 상당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암브로시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결국 징발령을 철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파견한 장군 [[플라비우스 바우토]]의 사망,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권리를 인정한 협정이 끝난 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재차 남하하면서 끝이 난다.(387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급히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달아났는데, 이러한 내전 과정에서 암브로시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비롯한 황가 일원이 밀라노에서 피신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스티나의 사망 후 암브로시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까지 아타나시우스파로 전향시키면서 아리우스파의 서방 교회에서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꺾어놓게 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아리우스파 세력은 이 시기에 사실상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