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리아 (문단 편집) === 신아시리아 === 아시리아가 [[오리엔트]] 지역을 석권하고 최강대국으로 등극하는 전성기이다.[* 단순히 국력만 강했을 뿐 아니라 학문, 건축, 문학 등의 문화도 발전하여 남긴 유물도 가장 많은 시대이다.] 신아시리아 시대는 기원전 911년 '''아다드 니라리 2세'''가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부터 아시리아는 뛰어난 관료 체계와 군사 제도를 운영하면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강한 국력을 구가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치세에는 아시리아가 서아시아 지역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수도를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아수르에서 [[님루드]]로 천도했다. 이때 님루드를 제국 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궁전과 성벽을 건설하고 수많은 시설을 건립하여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아시리아의 침체기를 기회 삼아 성장하여 라이벌 세력으로 등극한 북방의 [[우라르투]]가 위협을 가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하고 나서부터 다시 부흥하여 우라르투를 압박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상비군의 규모를 확대했으며,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군사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결과 아슈르나시르팔 2세 사후 이어진 아시리아의 침체기를 종식시키고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또한 적극적으로 대외 원정에 나서 시리아 지역과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바빌론과의 평화 조약을 파기하여 바빌론까지 정복했다. 그 아들인 '''살만누아사리두 5세''' 또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국왕 [[호세아(이스라엘)|호세아]]를 포로로 잡아가는 등의 전공을 올렸다. 이후 '''[[사르곤 2세]]'''의 시대에는 우라르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대도시인 무사시르까지 빼앗는 성과를 내면서 우라르투를 몰락시켰다. 또한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마르둑-아플라이디나 2세[*《성경》에서 나온 이름으로 메로다크-발라단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반란 실패 이후 [[엘람]]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가 반란을 일으키자 몆 차례나 군을 동원해 진압하여 결국 아시리아의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06년 수도를 님루드에서 두르샤루킨으로 옮겼지만 수도를 옮긴 지 1년 만에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에서 타발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여 아들 '''[[센나케립]]'''이 즉위한 후 [[니네베]]로 수도를 옮겼다. 센나케립은 즉위하자마자 [[네르갈]]의 신전을 재건하고 여러 대외 전쟁을 치루어 신아시리아 제국의 패권을 공고히 확립했다. 이 중에서도 [[남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히즈키야]]를 포위했던 일은《[[성경]]》에 등장하여 잘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장남인 아르다무리수를 왕세자에서 해임하고, 에사르하돈을 왕세자로 임명하여 장남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센나케립은 남유다 원정 철수 직후 니스록 신전에서 장남에게 살해되었다. 왕세자인 에사르하돈이 즉위하여 부왕의 암살에 관여한 인물들을 처형했고, 형제이자 암살의 주모자인 아르다무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는 우라르투로 망명했다. '''에사르하돈'''은 아시리아를 위협하던 [[킴메르족]]들을 격퇴하고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기원전 673년 겨울, 처음으로 이집트를 침략했으나 이때는 패배하여 원정 계획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본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제1차 이집트 침공이 실패한 후 에사르하돈은 건강이 악화된 데다 우울증까지 겹쳐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그러나 아시리아에서는 질병을 신이 내리는 형벌로 생각하여 병에 걸린 왕은 신들이 그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근거로 여겨졌기 때문에, 에사르하돈은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건강 상태를 신하들에게 숨겨야 했다.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은 제2차 이집트 침공을 단행했는데 1차 원정 당시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 2차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탈취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제25왕조의 흑인 [[파라오]]인 [[타하르카]]는 남쪽으로 피신했고, 2년 후 멤피스를 다시 탈환하며 점령지를 수복했다. 이에 에사르하돈은 제3차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여 다시 원정을 떠났으나 이집트에 도달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붕어했다. 재위 후기 극심하게 악화되었던 건강이 갑작스런 사망의 원인으로 주로 거론된다. 에사르하돈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마지막 [[명군]]이라고 불리는 '''[[아슈르바니팔]]'''이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기원전 664년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이집트 정복을 다시 달성했다. 다만 이집트를 직할령으로 통치하는 것보다는 조공을 제공하는 봉신국으로 두기를 원하여 아시리아와 관계가 있었던 프삼티크 1세를 이집트 [[이집트 말기 왕조#s-2.1|제26왕조]](사이스 왕조)의 파라오로 즉위시켰다. 또한 아슈르바니팔은 무예에도 능할 뿐 아니라 지식욕도 왕성하여 학문에 식견이 높았는데 본인이 수집한 점토판 문서들을 모아 수도인 [[니네베]]에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을 세웠다.[* 이 도서관은 설립자인 아슈르바니팔의 이름을 따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으로 불린다.《[[길가메시 서사시]]》아카드어 판본과 바빌로니아판 창세 신화인《[[에누마 엘리시]]》,《수메르어-아카드어 어학 사전》등의 중요한 유물이 이 도서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한편 각지의 포로들을 잔혹하게 죽였으며, 사자 사냥 등의 블러드 스포츠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사자 사냥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권의 왕실에서 인기가 있었던 스포츠였다. 사자를 풀어두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과 죽어가는 사자들이 부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당시에는 [[아시아사자]]도 [[이라크]]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식했다.] 아슈르바니팔의 치세에 형인 샤마쉬슈무킨이 다스리던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 2년이 넘는 포위전 끝에 바빌론이 함락되었고 샤마쉬슈무킨이 사망하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 샤마쉬슈무킨이 죽고, 바빌론이 함락될 때 도시에 큰 불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패배한 샤마쉬슈무킨이 [[분신]] 자살을 한 것이라고도 여겨져 왔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었든 잔인한 죽음을 맞았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때 바빌론의 반란을 지원한 [[엘람]]도 침공하여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렇게 아시리아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는 강대국이었지만 세력을 넓힐수록 더 많은 세력과 대치해야 하고 특유의 가혹한 통치 방식 때문에 적대 세력이 너무 많아져 안정적이지 못한 정세였다. 이 때문에 아슈르바니팔은 세상을 떠날 때, 아시리아가 분란에 자주 직면하는 세태를 두고 통곡하는 말을 남기며 붕어했다. 유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짐은 신과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잘 대접했으나 질병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짐에게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짐의 나라의 분란과 짐의 가족의 불화를 참을 수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창피한 사건들 때문에 늘 괴롭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짐을 짓누르노라, 짐은 고뇌에 울부짖으며 삶을 마감하노라, 죽음이 짐을 덮쳐 쓰러뜨리노라. 짐은 비탄과 한탄에 젖어 밤낮으로 울부짖노라.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다루시겠습니까? 부디 저를 구원해 주소서."''' ~~난 하노라고 했는데 왜 이따위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