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투스/평가 (문단 편집) === 사후 끼친 영향 === 그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혈연으로 탄생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혈연 관계에 대한 집착과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동 및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로 인한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먼저 정치적 판단 아래 복잡하게 꼬인 혈연 관계 탓에 후계 문제가 복잡해졌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41년이나 제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아그리파]]처럼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죽어버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객사[*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해 버렸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집착 수준의 혈통주의자였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선정된 후계자로 갖은 노력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고 인망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둘이 줄줄이 죽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 사회에선 별다른 반향도 없이 시큰둥했다.] 또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양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주변에게 ‘두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내 후계자이다’라고 솔직한 의중을 말해왔던 조카 딸 소 안토니아의 남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대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말은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살 위의 티베리우스의 혼처와 대 드루수스의 혼처 모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결정으로 진행된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를 모두 아들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인 티베리우스보다는 개방적이고 활발한 대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 유해가 이탈리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죽은 양아들 추도사를 직접 읽었고, 자신에게 대 드루수스와 같은 죽음이 선사되길 원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혈육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앞으로 대 드루수스 같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대 드루수스의 묘비에 자신이 손수 지은 시문을 새기고도 만족 못해서 전기까지 산문으로 만들었다.][*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결혼식 후 3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진짜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가지고 ‘아이 부모는 참으로 운이 좋다네. 아들을 3개월 만에 얻었으니’라는 내용의 풍자시와 노래까지 나왔다.]처럼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