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티누스 (문단 편집) == 개요 ==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 >― [[카를 야스퍼스]]의 평가[* 그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이다. 참고로 아래 언급된 《[[고백록]]》 7,10,16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님의 빛을 보았다는 묘사가 있다.] >진리의 연인 >---- >―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의 평가 4세기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교회 교부(敎父) 중 하나이며 [[교회학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법적 창설자는 [[교황청]]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든 [[수도회]] 그 자체는 반달족의 외침으로 와해되었고, 현재의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를 토대로 재건된 수도회이기 때문이다. 곧, 피난 때 아우구스띠노가 저술한 규칙서를 가지고 흩어진 소규모 공동체 + 규칙서를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로 고른 신생 수도회들 + [[베네딕토회]] 규칙서를 쓰던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회들을 전부 합쳐 교황청이 통합시키고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로 통일시킨 게 현재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이다. 이러한 통합은 당시 수도회 창설이 큰 유행이었기 때문인데, 이 우후죽순 창립되는 수도회를 잘 보존함과 동시에 관리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탈리아]] 곳곳에 흩어진 수도회들을 교황청이 직접 통합시켜 창설한 첫 수도회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설한 수도회 그 자체는 아니고 재건된 수도회로 통한다] [[그리스도교]] 교파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성인(기독교)|성인]]이다.[* 특히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공감할 여지가 많은 교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던 교부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이 경쟁하던 서로마 사회에서 여러 종교와 철학들을 전전하면서 내면의 방황을 겪은 교부였다. 이러한 환경은 여러 종교와 철학을 건드려보며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체험과도 통하는 면이 많다.] 보수성향의 개신교에서도 이 사람은 존경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게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가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가 분열되기 전이라서 이 사람의 신학관 중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가 공유하는 부분이 꽤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당시 기독교 분파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기에는 [[아리우스파]]와 [[네스토리우스파]]라는 분파가 존재했다. 두 분파는 이단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후세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이고, 이때는 지금 같은 가톨릭-개신교 같은 기독교 분파 중 하나였다. 당시 야만족, 특히 게르만족이 많이 믿던 게 아리우스파라서 좀 안 좋은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 2세]] 같은 황제도 믿는 꽤 메이저한 종파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할 당시 고향이자 사망지인 히포 레기우스는 [[아리우스파]]를 믿는 [[반달족]]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축일은 [[가톨릭]] 및 서방 교회에서는 [[8월 28일]],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는 [[6월 15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성장(聖杖), 학자를 상징하는 책과 깃펜, [[조개]], [[비둘기]] 등이 있으며, 양조업자, 인쇄공, [[신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가톨릭 관련 인물들은 물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의 [[개신교]] 신학자와 [[존 밀턴]] 같은 시인,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성찰>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 저서 <[[고백록]]>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고백록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하느님에게 가까워지는 인간-회심에 의한 내적인 질적 고양을 통해 하느님과 가까워짐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데카르트의 <성찰>도 1~2성찰, 3성찰, 4~6성찰 순으로 동일한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책 곳곳에도 아우구스티노적 표현이 나온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장 폴 사르트르]],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박사학위 논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논문이었다],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의 인물들만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교부들의 나무위키 문서와 비교했을때 이 문서의 분량부터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의 신학적 업적은 대체로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 젊었을 때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런 쓰디쓴 [[청년]]시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와 그 후 [[야훼|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마음을 써낸 것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es'')》이다.[* 《고백록》은 한국에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데, 그 중 '바오로딸'에서 출판한 최민순 신부역(천주교), '대한기독교서회'의 선한용역(개신교), 그리고 '경세원'에서 낸 성염역(천주교)주 판본이 평이 좋은 판본들이다.] 사실 회심 이전에는 동거녀와 [[사생아]]도 낳는 등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교 윤리가 확고히 정착하기 이전인 고대 후기 로마 사회의 시선으로는 밑바닥의 막장까지는 아니었다. 이교 신앙, 애인과의 동거 및 사생아 등은 [[고대 로마]] 기준으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였으니까.[* 가톨릭 사제의 독신 생활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314년 안치라 교회회의와 325년 니체아 공의회는 "미혼자들이 일단 [[성품성사]]를 받으면 결혼을 못하며, 기혼자가 [[주교]]로 서품되면 그 부인은 [[수녀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1170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남편이 사제품을 받으려면 아내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아내에게는 정결을 지키도록" 했다. 즉 서품 전 아들을 낳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는 아마도 허용이 가능한 범위였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녀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한 건 아니었고, 약혼자가 있는 마당에[* 약혼녀가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아니어서 기다려야 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사건을 계기로 약혼은 파기되었다. 애초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하는 결혼이 아니었으며, 어머니가 아들의 출세 때문에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 약혼으로 그는 동거녀와 이별했다.] 다른 여자를 두는 등 밑바닥이 아닐 뿐 떳떳한 삶을 산건 아니었다. 거친 비유를 들자면, 21세기에 문란한 성생활이 세속의 관점에서 밑바닥 취급을 받는 건 아니지만 떳떳한 취급을 받지는 못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던 시기이든 빛나던 시기이든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하였다. 성염 교수는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으로 표현했다.[* 《[[고백록]]》(성염 역주) 해제 中]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합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 >―《[[고백록]]》 13,9,10[* 아우구스티누스를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로 만드는 매우 유명하고 중요한 구절. 쉽게 말하면 내 정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곧 한 사람의 정체성, 더 나아가 행동을 규정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러한 사상을 더 발전시켜 <신국론> 14권에서는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과 인간의 도성이 갈라진 이유를 이타적/사회적 사랑(하느님의 도성)과 이기적 사랑의 인간의 도성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라틴 문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라틴 문학 말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로마가 아닌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인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황실에서 수사학 교수로 초빙할 정도였다. 문체 역시도 그의 삶을 반영하듯이 심미적이며 열정적이다. 이후 훗날 가톨릭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교할 경우, 토마스가 대학 교수님으로서 정돈되고 깔끔한 논리적 문체를 사용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선의 사목자로서 수사학적이고 변증법적인 문체를 사용한다. 토마스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자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에 대한 형이상학자이며, 절제된 감정의 토마스식 문체에 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체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투쟁적이다. >교회와 신학 역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 토마스에 비해 훨씬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틴 신학의 진정한 창시자는 토마스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이다. 토마스의 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몇 가지 불확실함과 애매모호함을 걷어 내고, 그의 사상을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이어 주었으며, 보다 견고하고 확실한 철학의 무기를 활용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을 완벽하게 하고 진보시킨 데 있다. 토마스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신의 첫 번째 스승으로 인정한 바 있다. >---- >-바티스타 몬딘{{{-2 ''Battista Mondin''}}} 씀, 이재룡 등 번역, 《신학사》{{{-2 ''Storia della Teologia''}}} 제4권 736쪽 >물론 방대함과 치밀한 구성에서 이 책을 능가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도 있다. 그렇지만 「신국론」을 읽고 있을 때, 우리는 「신학대전」과는 다른 독특한 감동을 받는다. 바로 이 책 안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녔던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열정적 문체로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수사학 전문가였던 노주교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백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 >[[박승찬]] 교수(엘리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308079&path=200909| ]] >제가 1946년 초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몇 가지 작품을 접하여 읽었던 것은 유익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표현한 이런 개인적인 싸움은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딘가 비인격적이기도 합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 속에도 큰 싸움이 있습니다만 이는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발견됩니다.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작품을 극적이고 아름답게 했습니다. >---- >-《마지막 이야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페터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옮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