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티누스 (문단 편집) === 청년 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 ===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문법학교에서 선생들의 너무 심한 매질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다고 <[[고백록]]>에서 밝힌다. 그 여파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 공부를 포기한듯 하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비신자였던 자기 아버지에게도 감사를 돌리는데, 유독 어렸을 적의 교사들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당시에 강제로 했던 공부가 너무 싫었는지, "언어공부는 학생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였다.], 370년에는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카르타고]] 대학에 입학해 수사학을 전공했다.[* 여기에는 타가스테의 부자 후원자였던 로마니우스의 도움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로마니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도 그 가정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371년 사망했는데, 점점 방탕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죽기 직전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철학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스스로 도취하여 어머니의 바람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372년부터는 노예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아데오다투스'[* Adeodatus. A deo datus로 풀어서 해석하면 하느님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왜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생활만 했는지는 불명이나,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고백록에서 "떳떳하게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지각 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다." 라고 밝혔다. 아데오다투스는 372년에 태어나 388년에 일찍 죽었고, 여인과 동거하는 생활은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에서의 공부를 끝낸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 교수 자격증을 따 고향으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세웠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고백록 4권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서로 마음이 잘 통했던 친구였던 듯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열병이 돋아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던 와중에 세례를 받았다.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례받은 것을 갖고 농담을 던졌다. 그도 그럴게 그 친구 역시 의식을 잃기 전 기독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어쩐인지 그 친구는 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하고 일갈했다.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 크게 충격을 주었고, 얼마 뒤 그 친구는 다시 쓰러지고 결국 사망했다. 친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고 슬퍼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택한 길은 친구와의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 다시 카르타고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진리와 악 등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19살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저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서만 일부 구절이 남아 전해진다.]라는 책을 읽은 뒤로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화 되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 모니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던 경험으로 그는 우선 성경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가줘다준 키케로나, 그가 주로 읽던 수사학, 철학 책보다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성경의 문체 때문에 곧 그만둔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질문의 답이나 진리를 [[마니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 당시 마니교는 로마 황실에 의해서 공공연히 믿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의 문제]] 등에 관해서 선악이분법적인 설명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꽤 먹혀들어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이들이 마니교를 많이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373년에는 열렬한 [[마니교]]도가 되었다. 그의 첫 저서도 마니교의 미학을 다룬 책이며, 자신의 친구들[* 알리피우스나 네브리디우스. 물론 이들도 나중에는 어거스틴과 같이 마니교를 떠났고, 알리피우스는 394년에 타가스테의 주교가 되었다.]도 많이 마니교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철학자들의 말들에 비해 마니교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의구심을 풀어줄 마니교의 교사 파우스투스가 [[자유7과|자유학예]]는커녕 기본지식이나 간신히 갖추고 있는 인물임을 알고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이때 파우스투스가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 것에 대해서 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결국 382년, 그는 마니교를 떠났고[* 그러나 마니교의 신자들과 교류는 로마로 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마니교의 인맥을 통하여 출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 9년간 몸담았던 믿었던 진리가 가짜였음에 허탈감을 느껴 진리는 알려질 수 없다는 회의주의 학파 [[아카데미아]]학파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플라톤주의]][* 주의하자, 플라톤의 사상에 빠진 게 아니라 플라톤주의에 빠졌다.]에 빠졌는데 그것도 잠시, 383년에는 아예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로마]]로 가 수사학 교수 일을 했고[* <고백록>에 따르면, 카르타고 학생들이 너무 망나니 같은 데 비해, 로마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학생들은 온갖 편법을 다 부려서 수업료를 내지 않으려 하였다.][*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갈 때, 어머니는 반대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머니를 버리고 몰래 배를 타고 떠나가 버렸다.], 학생이 도무지 학비를 안 내자 질려서 이듬해 [[밀라노]]로 옮겨간다. 때마침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를 구한다는 전령이 로마시로 왔고,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시키려 하였던 로마의 시장과 마니교도들의 지원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떠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니교의 이러한 계책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와 완전히 연을 끊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본래 로마는 어머니 모니카가 모르게 갔던 것인데, 이 소식이 어머니 귀에 들려와 아들을 찾아 밀라노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의 턴포인트가 되는 인물인 성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주교]]를 만난다.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 인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 원래 기독교를 깔봤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에 나갔던 이유는, 마니교에 대한 회의와 기독교에 대한 재평가 때문이었다. 마니교와 기독교의 토론을 지켜보고, 기독교가 힘이 없는 종교가 아님을 느꼈다.] 그의 강론을 틈나는 대로 경청하곤 했는데, 딱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잘 하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끈 것은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이 해석법은 성경의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그 안의 상징적 의미들이 있다고 보는 해석방법론이다.], 그 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 세속적 출세욕과 여자문제. 그는 당시 낮은 등급의 총독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 모니카도 자기 아들이 내심 그렇게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로 고민하던 때였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살던 고향 친구가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극도로 절제된 수도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는 쾌락에 빠진 노예인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성적 쾌락 외에도, 그는 수사학을 통해 로마에서 성공하고픈 세속적 야심도 갖고 있었다. <고백록> 전반적으로 아들의 기독교 회심을 기도하던 어머니 모니카마저 그의 세속적 명예욕을 부추겼다.(고백록 6권 참조)] 심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있는 책을 집어서 펼쳐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 >-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아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갑자기 가슴에 병이 생겼는데, 이를 핑계로 수사학교사 직을 내려놓았다.], 그의 지인들과 카시키아쿰의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어머니 모니카, 아들 아데오다투스, 동생, 그의 동료들과 제자도 그와 같이 머물렀는데, 이때 그는 본격적으로 성서연구에 들어갔으며, <독백록>과 <행복한 삶>, <질서론>,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의 카시키아쿰 저작을 저술했다.]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다. 또한 이듬해(387) [[4월 13일]]에는 친구 알리피오(Alypius, 축일 [[8월 15일]]),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32세. 한편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 여인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