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프리카 (문단 편집) === 15세기 이후: [[유럽]] [[식민제국]]의 침입 === 15세기 소위 [[대항해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그 중간에 지나가야 하는 아프리카 항로 개척과 식민화에 열심이었는데, 1415년에 [[인판트 동 엔히크]](항해왕자 엔리케)가 북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한 것을 서구인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엔히크는 1460년 [[카보 베르데]]를 발견, 그의 사후 뒤를 이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남아프리카 끝의 [[희망봉]]까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270도 도는 항로 개척이 완성되었고, 그 중간중간의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루안다]], [[모잠비크]] 등에 중간 기착지로서 식민기지가 건설된다.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서 [[스페인]]과 교통정리를 했으며, 이 시기 아프리카에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다. 다만 이 때는 바다 근처의 일부 지역만 식민 지배의 대상이었고, 내륙은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체가 계속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이 발견하면서, 서아프리카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다. 현대 [[미국]]과 [[브라질]] 등 아메리카에 사는 수억 명의 흑인들은 사실상 대부분이 이 때부터 있었던 [[노예]] 무역의 결과인 것이다. 15세기 이후에는 서구 열강의 노예 무역과 새로운 질병의 전파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어 집권적인 국가의 성장이 지체되었다. 흔히 유럽 열강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꼽히는 노예 무역은 사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아프리카 내에서도 자주 행해졌고, 아랍인에게 수출하는 일도 흔했다. 문제는 유럽 각국의 이권을 위해 '''노예 사냥이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격화되었기에, 이는 아프리카의 인구를 대대적으로 유출시켜서 정상적인 국가 및 행정 구조의 성장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유럽인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부터 전해진 [[카사바]], [[옥수수]] 등의 전래는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더욱 많은 인구의 부양을 가능하게 하였다. ~~병 주고 약 주고라고나 할까.~~ 이 결과 서아프리카 해안에는 아샨티, 다호메이, 요루바, 오요 등의 국가가 건립되기도 하였는데, 이 국가들은 사람들이 주로 생각하는 '미개한 아프리카', '부족들의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나름대로 건실한 국체를 이루며 유럽과 교역하면서 19세기 후반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콩고 왕국]]의 국왕 [[은징가 은쿠와]]는 이미 15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아들을 포르투갈에 유학 보내기도 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이를 명분으로 아프리카 연안 단속에 나서자 유출되지 않은 노예는 아프리카 내부에 존재한 국가들에 수용되어 토착 국가의 확장이 일어났다. 이 무렵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고무, 커피, 카카오, 기름야자 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럽과의 교역은 노예 무역에서 상품 작물을 수출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아프리카 자체의 노동력 수요가 늘어나자 노예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더욱 확산되었다. 19세기까지 유럽 세력은 아프리카 연안의 얇은 지역에서만 군사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을 뿐, 내륙의 드넓은 지역까지 포함한 본격적인 식민 지배는 이루지 못했다. 사실 아프리카인들도 이미 오랫동안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서 화기를 잘 알며 획득해왔고, 그들의 무기 기술력은 동시대 유럽의 최신 기술까지는 아니지만 19세기까지 [[조총]]에 머물던 아시아에 지지 않은 수준이었다. 특히 석궁을 든 [[스코틀랜드]]의 [[역관광|노예 상인을 총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이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이 19세기 이전에 아프리카를 내륙까지 지배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아프리카 깊숙한 지역의 질병과 열대 기후가 유럽인들에게는 영 견디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만화가인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15세기 경의 [[포르투갈]] 탐험가들의 사례가 나온다. 당시의 [[서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비만 오면 생기는 물웅덩이를 두려워하여 피했는데, 당시 포르투갈에서 온 탐험가들은 '저들이 미개해서 저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다'는 식으로 비웃었고,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면서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조롱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물웅덩이를 피한 진짜 이유는 거기에 서식하는 [[기생충]] 때문이었고, 덕분에 원주민들을 비웃고자 그곳에 걸어 들어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체스트 버스터|그 기생충이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오는]]''' 충격적인 상황을 맛봐야 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유럽인들은 19세기에 들어 [[해열제]]인 퀴닌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아프리카 내륙 지역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열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으로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유럽인의 식민지 건설은 15 ~ 16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아프리카 연안의 소규모 도시나, 온대 기후라 거주 환경이 좋은 남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콩고]]와 [[모잠비크]] 해안을, [[덴마크]]와 [[영국]],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의 [[https://ko.wikipedia.org/wiki/황금_해안|황금 해안]], [[노예 해안]], [[상아 해안]], [[후추 해안]]을, [[오만]]은 동아프리카 해안 일대를 지배했다. 내륙 지역까지 지배에 성공한 [[식민주의]] 국가는 거주 환경이 좋은 남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네덜란드]], 그리고 [[이집트]]를 통치한 [[오스만 제국]]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