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아프리카 (문단 편집) ===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 아프리카의 혹독한 자연 환경과 토착 왕조의 저항은 대항해시대 이후 수백 년간 그럭저럭 유럽인의 아프리카 본격적 진입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유럽은 [[데이비드 리빙스턴]], [[https://ko.wikipedia.org/wiki/헨리_모턴_스탠리|헨리 스탠리]] 같은 [[탐험가]]를 파견하면서 내륙 아프리카의 지도를 완성했으며, 슬슬 아프리카 내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아시아 식민화가 고착 상태에 빠지고, 원래 유럽인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이 대대적으로 독립했고 노예 무역도 거의 폐기되었다. 유럽인들은 이득을 얻을 새로운 만만한 '식민지'를 찾았고, 그것이 아프리카 내륙의 완전 식민화였던 것이다. 물론 이 때쯤이면 아프리카 국가들도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총과 대포로 무장했으나[* 오히려 [[19세기]] [[동아시아]]보다 더 최신 유럽 무기를 많이 갖추고 있었다. 동아시아보다 아프리카가 유럽에서 훨씬 가까우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유럽 각국은 비유럽인을 압도하는 '''[[개틀링 기관총|개틀링]], [[맥심 기관총]], [[야포]]''' 등의 더 대단한 무기를 개발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을 손쉽게 압도한다. 특히 의학 기술의 발달로 아프리카 내륙의 질병을 견딜 수 있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유럽 국가들한테 정복당하여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저항해 투쿨로르와 [[수단 공화국|수단]] 등에서는 [[마흐디]](Mahdi, 구세주) 신앙에 근거한 이슬람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한동안은 교단이 다스리는 신정 국가가 들어서서 영국의 침입에 잘 저항했으나,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과 싸운 옴두르만 전투에서 5만 명의 수단군이 무참히 궤멸되는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결국 영국한테 6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다. 서구 열강들의 아프리카 나눠먹기는 경쟁이 심해져 공개적으로 자기들끼리 [[보어전쟁]] 같은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1884년 [[베를린 회담]]을 통해 거의 최종적으로 중재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아프리카의 35.6%, 29%를 잠식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포르투갈]], [[벨기에]], [[독일]] 등이 아프리카의 7% 정도씩을 차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마그리브 지역과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시작해 끝내 서아프리카 내륙을 대부분 식민지로 장악하였고, 영국은 이집트와 수단, 남아프리카, 나이저 강 하구를 장악한 뒤 서서히 동아프리카 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스페인]]은 신대륙 식민지에 집중했던 나라라 아프리카에는 식민지가 많지는 않았지만 [[서사하라]]를 포함한 모로코와 [[적도기니]]를 정복했으며,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 등 전통적인 해안 식민지에서 좀 더 주변 내륙 지역으로 뻗어나간 지역에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 외에도 후발주자인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등도 아프리카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특히 벨기에의 [[콩고 자유국]]은 [[레오폴드 2세|같은 제국주의 열강마저 맹비난할 정도로 비인도적인 통치로 악명 높았다.]] 최종적으로는 미국 흑인들의 이주를 명목으로 미국이 독립시켜 준 [[라이베리아]]와 [[메넬리크 2세]]의 근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둔 [[에티오피아]] 제국 두 케이스를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이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프리카에 대한 경제적 착취'는 [[20세기]] 초반까지 성공적이지 못했고(경제 목적으로 점령한 지역은 목화 산업이 번영했던 이집트 정도뿐), 흔히 알려진 '아프리카 횡단 정책'과 '아프리카 종단 정책'도 영토 과시 외에는 큰 기능을 하지 못했다. [[식민지]]를 확보한다고 철도가 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통치 형태도 대체로는 간접 통치 형태였다. 사실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를 촉진한 이유는 경제적 타산이 아닌 유럽 각국 자본가들의 시장 확보를 위한 탐욕, 정치가들의 국가주의적 경쟁의식 등이었다. 실제로도 식민지 유지에 자원이 많이 들어간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식민지가 적었던 독일은 그만큼 본국에 대한 투자를 통해 좀더 고도성장이 가능해서 1차대전 당시에도 강국이었고, 패전 이후 식민지를 죄다 뺏긴 독일은 모든 역량이 본국에 투자됨으로써 2차대전에도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식민지들에 돈 나갈 데가 많았던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랐던 점이었다. 하지만 유럽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프리카에 도움이 되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착취적 플랜테이션 농업과 군사적 지배 구조, 타 유럽 국가와의 정치적 대결을 위한 무분별한 식민지 확장,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이 시기의 아프리카는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특히 '''유럽의 제국주의 정책이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그나마 아프리카에 존재하던 고유 국가 체제를 파괴한 다음 유럽 취향대로 재배치했다는 점인데, 이것이 부족들이나 소국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통제력을 떨어뜨려서 이후 아프리카에 벌어질 수많은 혼란상을 야기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통제할 수 없는 분쟁이 발생하면 그렇게나 미워하던 옛 종주국에게 개입이나 중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의존적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아프리카도 전쟁에 끌려들어갔다. 열강의 식민지 주둔군이 서로 싸웠고, 본국에서 증원군이 넘어와 싸움이 더 커졌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식민지를 중심으로 싸움이 이어졌다([[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항목 참조).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탈리아 왕국]]이 아프리카를 정복해 [[이탈리아 제국]]을 세울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이탈리아는 이집트를 침략하면서 아프리카 전선이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도 이탈리아 편을 들었고, 반속국 상태나 다름없었던 [[이집트 왕국]]은 영국과 함께 연합군 측으로 참전했다. 한편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군의 심각한 졸전]](...)으로 나치 독일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유명한 [[에르빈 롬멜]]을 파견하여 북아프리카 전역 정복 직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결국 [[추축국]]은 패배했고,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을 모두 몰아냈다. 에티오피아도 1936년부터 한동안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다가 이 때 해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