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비 (문단 편집) == 생애 == 1103년 하남성 상주[* 현대의 허난 성 [[안양시(중국)|안양]]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송사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자도 비슷한 의미인 붕거(鵬擧)라고 지었다. 한편 악비가 태어난 직후 황하가 범람해 고향 마을은 박살났고, 그 과정에서 부친인 악화(岳和)가 홍수에 휘말려 익사하여 어머니인 요씨와 함께 하북으로 옮겨간다.[* 악화가 살아남아 악비가 8살이었을 때에 재회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또 전술한 [[황하]]가 범람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악비를 안은 채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야사가 있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용맹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매우 셌다고 한다. 그의 무술 스승 진광(陳廣)[*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이 고용했다고 한다.]으로부터 창술과 검술을 배우고 주동(周同)이라는 명궁으로부터 궁술을 배워 300척 밖까지 화살을 쏘고, [[쇠뇌]]를 8석까지 감당할 정도로 뛰어난 활 솜씨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학문 공부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손자병법|손자]], [[오자병법|오자]] 등을 밤낮으로 탐독했으며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1122년 [[북송|송나라]] 군에 의용병으로 입대하여 [[카이펑|개봉]]을 수비했다.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 조정이 피난하자 [[우한]]과 양양을 중심으로 [[후베이 성]]의 군벌이 되었다. 1126년에는 화북 지방을 침공한 금나라 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으며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자 [[고종(송)|고종]]을 따라 남하한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반드시 승리하며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 악비가 지나는 마을의 백성들은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쳤으며, 악비군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라는 의미로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불렀다. 악가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흔드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흔드는 건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악비는 [[한세충]], [[장준(송나라)|장준]], 유광세 등의 군벌들과 합세하여 금나라 군을 회하 이북과 진령산맥에서 저지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구릉지대가 많은 강남 지방의 지형의 이점을 살려 금나라의 철기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였다.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한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 1134년 임명된 청원군절도사(淸遠軍節度使)를 거쳐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에는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어 장강과 회하 사이의 일부 지역을 수복했다. 이후 중원 수복을 위해 악주[* 오늘날 우한 시 우창 구][* 악주는 양양과 함께 나중에 남송 정권의 또다른 요충지가 된다. 서쪽으로는 사천, 북쪽으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는 양회 방면을 원조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이후 악비는 강하게 북벌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금나라와 싸워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자는 주장으로 인해 주화론을 밀던 재상 [[진회]]와 매우 심한 갈등을 빚게 된다. 진회는 매번 승전을 거듭하는 악비를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주전파 군벌들은 주화파 관료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4번에 걸쳐서 북벌을 했는데 4번째 북벌에서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낙양과 정주 등을 회복했으며,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불과 40여 리 떨어진 주선진까지 점령했다. 이때 금나라 대장 [[완안종필|올출]]은 여러번 패전하자 개봉을 버리고 퇴각하려고 했으나, 한 문관의 만류로 개봉을 끝까지 수비한다. 그 문관은 올출의 말고삐를 잡으며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하면 외지에서 아무리 능력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올출은 문관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 악비의 북벌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악비의 후손이 쓴 일종의 행장인 금타졸편(金佗稡编)과 금타속편(金佗续编)에 기초하기 때문에 거의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주선진 전투만 봐도 그 출처는 악비의 후손이 쓴 행장과 송사 악비열전 정도가 전부이며 앞의 기록들 외에는 과연 주선진 전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조차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금나라와 송나라는 이 당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주선진 전투는 설령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선진 전투의 병력에 대해서도 악비군은 5백 명인데 금나라의 군사를 10만 명으로 잡아 엄청난 대첩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만약 이 묘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대단한 전투를 치러 악비가 이겨 카이펑의 코앞에서 금나라의 주력을 박살내고도 송나라는 이후 수도를 수복하려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다른 사가들은 하다못해 주선진 전투에서 이겼는데 송나라군이 카이펑으로 왜 진군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없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송나라가 카이펑을 되찾을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을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악비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전쟁 시에는 이를 금했다. 그러나 [[하얼빈|금나라 수도]] 근처의 [[창춘|황룡부]]까지 진격하면 병사들에게 거나하게 먹자고 약속하고 다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이러한 악비의 주전론으로 인해 금과 화친해야한다는 주화파 재상 [[진회]]와의 마찰은 심화된다. 진회는 1141년 군제개편을 명목으로 기습적으로 당시 군벌들의 지휘권을 모두 박탈하고 모든 병사들을 중앙군 휘하로 전속시킨다. 당시 [[남송]]의 황제 [[고종(송)|고종]]의 마음도 [[진회]] 쪽에 더 기울어져 있던 터라 그를 12번이나 불러 소환시키고, 악비는 양자인 악운, 악가군 간부였던 장헌과 함께 투옥되었다. 악비는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데, 일설에는 살가죽을 벗겨 죽였다고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사약을 받아 사사당했을 것으로 본다. 이때 악비의 전우이자 또다른 주전파인 [[한세충]]이 "악비의 죄상이 무엇입니까?"라며 따지자 [[진회]]는 '''"아마 있을지도 모르오"'''(막수유, 莫須有)라는 궁색한 대답을 했고, 이에 기가 막힌 한세충은 '''"고작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며 한탄했다 한다. 이후 [[진회]]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적극적으로 매국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라에 충성을 한 신하였지만 지금도 진회를 까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대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당대에도 진회의 평은 좋지 않았던 것이 진회는 재상이 되었을 때 안하무인으로 매우 오만했으며 문자의 옥을 일으켜 자신의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정도로 잔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진회의 권력은 진회를 발탁한 황제인 고종 본인조차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커져서, 진회 사후에는 악비를 사랑하고 진회를 증오하던 [[효종(송)|효종]]에 의해 진씨 일족이 멸족당한다. 악비는 미천한 신분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죽어서는 최고의 시호와 [[왕]]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진회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평가는 허구한날 오물을 뒤집어 쓰는 4인방 동상이 잘 보여준다. 악비 사후에는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화친 협정을 치욕으로 봤던 당대 인사들의 여론으로 인해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으며, 1155년 진회가 죽고 누명이 풀려 혐의가 무효화되고 신원되었다. 1178년에는 [[효종(송)|효종]]에 의해 [[시호]]로 '''무목(武穆)'''을 받아 구국의 영웅으로 평가되었다.[* 최고의 시법은 충(忠), 무(武), 장(壯), 목(穆) 네 글자 중에 구성된 '충무-충장-장목-무목'인데, 악비는 덕분에 무관의 최고급 시호인 충무(忠武)와 문관의 최고급 시호인 무목(武穆)을 모두 받게 되었다.] 1204년에는 [[영종(남송)|영종]]이 [[왕작|왕]]으로 추존하여 [[항저우]]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고, 시호를 '''[[충무(시호)|충무]]'''로 개정하였다. 악비 사랑이 지극하였던 효종은 악비가 살아있었다면 모든 것을 해주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