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악비 (문단 편집) === 정치적 재평가 === [[파일:/image/036/2004/03/04/021105000120040304499_70.jpg]] 악비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절에는 잊혔으나, 한족이 중원을 되찾은 명나라 시절에 대폭 고평가된다.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 주원장 자신이 여진족과 다를 바 없는 북방 이민족인 몽골족을 물리치고 한족왕조를 재건했기 때문에 악비를 자신들의 선구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악비를 신격화 했고, 이렇게 신이기 때문에 "공"이나 "왕" 같은 작위를 추증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악비를 높였다. [[만력제]] 시기가 되어서야 아예 황제급으로 높인 삼계정마대제충효묘법천존악성제군(三界靖魔大帝忠孝廟法天尊岳聖帝君) 이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한족 왕조였던 명나라 시기에는 호국 영웅으로 존경받았지만, 악비와 대립했던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절부터 악비 숭배는 퇴색한 면이 있었고[* [[옹정제]] 시절 엄청난 군공을 세운 한족 장수 악종기는 악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만주족들의 의심을 받았고, 작은 실책에 관직을 잃고 장기간 투옥되었을 정도로 청나라는 악비에 알레르기를 보였다.], 청나라 조정은 악비 대신 이전부터 군신으로 칭송되었던 [[관우]]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https://baike.baidu.com/tashuo/browse/content?id=aa3243d2536e811aa52f9897|#]] 관우를 높여 성자이자 황제로 칭한 관성대제(關聖大帝)라는 시호를 붙여준 것도 바로 [[순치제]]였다.[*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들이 악비를 폄하한 것은 아니다. 강희제, 건륭제는 남행중에 항주에 있는 악비묘를 참배했고, 악비의 후손을 찾아내 상을 주었다.] 청나라는 망했지만, 악비숭배는 또다른 의미에서 다시 퇴색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은 [[소수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중화민족]]과 [[다민족국가]] 개념을 주장했고, 악비는 한족중심주의를 상징했기 때문에, 이런 [[중국 정부]] 방침과 잘 맞지 않아서 정부차원의 기념사업은 퇴색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많은 봉건왕조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에 있던 사당이나 목상이 [[홍위병]]에 의해 박살났다.[* 사실 악왕묘는 전란중에 여러번 파괴되었다가 [[1918년]] [[중화민국]] 시절 다시 재건된 것으로 크게 역사적 가치는 없다. ] [[항저우시]]에 있던 악왕묘도 당연히 홍위병에 의해 훼손되었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9년]] 서둘러 복원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국에서의 오해와는 달리 달리 당시 [[홍위병]]들은 중화민족주의나 팽창주의를 봉건주의의 잔재로 보고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국제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국-자민족을 중심으로 두는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1920년 외몽골 독립은 중국 입장에서 영토상실이었지만 당시에 유명한 좌익문필가이자 고전학자였던 [[곽말약]]은 이를 찬양했을 정도. 사실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장아이핑]]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당원들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 했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주도한 일이라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공산당의 개국공신인 [[장아이핑]] 장군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참모들에게 "외몽골은 원래 중국땅이었어"라고 말했다가 [[홍위병]]들에게 "봉건주의 반동분자"으로 비판받아 두들겨 맞고 숙청이 되었고, 5년간 감방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었으나 구타당해서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다만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끝까지 몽골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도 몽골 공화국의 영토를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악비는 농민반란 진압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민중사관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성향에도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악비를 폄훼하기 위해 악비와 대립했던 [[진회]]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진회는 한간의 선구로 최근까지도 규탄되고 있다.[* 정부에 의해 검열되는 [[바이두 백과]]에서는 진회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간신중의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 "是中国历史上著名的奸臣之一" 중국언론의 한 기사에서는 진회를 민국시절에 일본에 붙은 [[한간]]인 [[왕징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https://www.sohu.com/a/384478746_100290589|#]]] 즉 악비를 크게 높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회 같은 반역자까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정부의 사관에 반발을 품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소수민족사까지도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중국 정부의 입장상 소수민족사를 다룰 때 갈등 요소(이민족 정권의 침공으로 인한 학살 등)는 회피하려 하고 소수민족 정권에 우호적인 서술도 다소 넣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 불만을 품고, 여기에서 비약하여 '정부가 하다하다 이젠 진회같은 놈까지도 재평가한다'라는식으로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일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진회의 대금 유화책을 송나라의 한계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이것이 진회를 옹호하는 투로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학술적 연구를 정부의 공식입장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나간것이다.] 이렇게 만주족이 지배층이던 청나라 시절부터 악비 숭배는 퇴색하기 시작했으며, 다민족국가를 표방하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수민족의 정서를 고려하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좀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교과서 등에서 악비를 가리키는 '한족의 영웅' 등의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초등학교]]의 어문 교재에는 악비의 행적이 실리고 있으며, 이는 악비가 평가의 강도는 있지만 체제를 뛰어넘어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협소설로 이름난 [[김용(1924)|김용]]도 아주 세심하게 공을 들여 찬사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사조삼부곡은 모두 악비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의지가 이어져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