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비 (문단 편집) === 군사적 재평가 === 정치적인 문제와 별개로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악비의 전공을 재평가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비의 전공은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한다. 정사인 송사 악비전 역시 행장을 바탕으로 저술한 데다 보병 몇백 명으로 기병 몇만을 몰살시켰다는 식의 황당한 전과가 많아 신뢰하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금사]](金史)에는 악비가 패한 기록 역시 여럿 나오거니와, 악비의 전공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안 되거나 하다못해 공신력 있는 사서에 채택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사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악비의 최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선진 전투만 봐도 동시대 '''남송'''의 사서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 남송의 이심전(李心傳, 1166∼1243)이 남송 초기의 대요를 적은 역사책. 200권. 1127년부터 1166년까지 40년간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이나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휘종, 흠종, 고종 등 3조(朝)의 치세를 기록한 책으로 12세기 중 약 50년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간의 전쟁과 화평의 교섭관계를 기록하였다. 남송의 서몽신(徐夢莘)이 자료 200여 종에 입각하여 편년체로 편집한 250권짜리 저서이다. 1194년에 완성되었다.]에는 아예 주선진 전투가 나오지도 않는다. 괜히 송사 악비전의 내용을 신괴할 수 없다고 학자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다. 악비전 기록만 보면 8천으로 조성의 10만 대군을 이기고 불과 5백 명으로 주선진에서 올출의 10만 대군을 털었다는 얘기나 8백 명으로 왕선등의 도적 50만 명 이상을 남훈문에서 격파했다는 얘기가 줄줄이 나오니... 물론 악비급으로 소수의 군세로 다수의 군대를 턴 명장들이 없지는 않았으니, 악비도 그 급이라고 한다면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또한 현대에는 그간 악비의 명성에 묻혀 당시 전공을 세운 종택[* 宗澤. 1059 ~ 1128. 북송 말의 장군으로, 일명 "강을 건너라!"("過河! 過河!")란 유언으로 유명하다. 남송군을 이끌며 금의 공격을 수없이 막아낸 장군이다. 북벌 의지를 죽을 때까지 버린 적이 없던 터라 틈만 나면 고종에게 북벌을 간언했으나, 고종과 문신들이 북벌은 무리임을 말하며 항상 묵살하였다.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에서 해당 고사를 얘기하면서 "[[제갈량]]과 더불어 '한 사람의 죽음에 전군이 통곡한' 사례"라며 극찬한 바 있다. 악비 또한 종택에게 발탁받아 휘하에서 활동한 바 있다.], [[충사도]][* 할아버지 [[충세형]], 아버지 [[종악|충악]]과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 한세충, 맹공 등 그동안 악비에 가려 상대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다른 인물들이 다시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정통 사서를 기준으로도 초인적인 업적을 이루어냈음에도 후배인 악비의 대중적 인기에 묻혀 부각되지 못했던 한세충이 진정한 [[인간흉기]]로서 인정받는 추세이다. 악비의 처세술 또한 좋지 않다고 지적받는다. 그는 평소 우직한 성격답게 [[고종(송)|송고종]]의 어그로를 끄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금군에게 함락 직전이었던 임안과 송고종을 구한 후 악비는 송고종에게 황태자 책봉을 건의한 것이다. 악비 입장에선 국가의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자는 의도였을지 모르나, 송고종 입장에선 그야말로 위세등등해진 [[군벌]] 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어그로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 때문인지 이후 송고종은 악비를 견제하고자 주화론을 주장한 [[진회]]를 지지하였다.[* 사실 애초에 고종 자신이 주화론자이기도 했다. 악비의 전공이 후대에 어느 정도 부풀려졌음을 감안하면, 고종 입장에선 송이 멸망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금과 전면전을 벌이긴 꺼림칙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는 고종의 선대였던 휘종이나 흠종이 금을 뒤통수 치다가 결국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났고, 고종의 후계자였던 효종 역시 북벌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고종 자신도 황제가 되기 전 잠시지만 금에 포로로 갔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정치에는 까막눈이었던 악비는 재상 이강을 비난하는 실수도 저질렀다. 이강은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할 때 일개 문관의 신분으로 개봉 수성전을 지휘하여 격퇴시켰던 구국의 영웅으로, 그 능력과 명성 때문에 고종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싫어하면서도 민심 수습 차원에서 재상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황잠선, 왕백언 같은 주화파[* 당시 송나라 사람 사이에서 영토를 빼앗고 굴욕을 준 철천지원수인 금과 화의하겠다는 주화파는 매국노와 거의 동등한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비난했으니 큰 실수였다. 현대 들어선 많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악비의 시《만강홍》(滿江紅)이 명나라 시대의 [[위작]]이라는 판정도 받았으나 지금까지도 진위 여부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으며 위작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악비라는 인물이 보통 장수를 뛰어넘는 명장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악비가 충무의 시호를 받고 왕으로 추숭된 후 대대로 칭송받는 이유는 악비가 생전에 공적이 뛰어난 무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사]] 기록이라고 하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떤 장수의 전공을 조작하거나 과장할 수는 있어도 [[졸장]]을 [[명장]]으로 띄우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공적이 과장됨이 있고 없고 차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