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경신 (문단 편집) === 폭탄 의거 === 상하이로 망명한 안경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경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고 한다. >나는 3․1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1920년 7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원시찰단이 필리핀, 중국, 일본 등을 시찰 방문할 예정이며 한반도도 그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임시정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 했다.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일제의 식민지배 기구들을 공격해 민심을 요동치게 해 대대적인 시위를 촉발시켜 미국과 세계 여론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영에 국내 폭탄 거사 실행 명령을 내렸다. 광복군 총영은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대원 13명을 선발해서 3개 대로 나누어 밀파했고, 거사용 폭탄으로는 구국모험단이 12개를 제조해서 임득산이 안동의 이륭양행까지 운반한 후 의용단의 각 지단으로 보냈다. 결사대 제1대는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 제2대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 제3대는 이학필, 임용일, 김응식 등이었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을 맡았다. 안경신이 속한 제2대는 의용단 평양지단의 협조를 받으며 국내로 잠입해 서하면 파출소를 타격한 후 의주, 삭주, 구성군을 지나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자신들을 검문하려는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8월 1일 평양성 내에 잠입했다. 그들은 의용단원 한준관이 운영하는 포목상점을 연락장소로 삼고 대동군의 [[박치은]]의 집에서 몸을 숨겼다. 안경신은 제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무사히 가지고 왔다. 이후 의용단이 평양 시내 각처에 〈최급경고문〉을 살포해 관공부서에 일하는 관리들은 퇴직하고 부역배들은 회개하며 국민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8월 3일 밤 9시 30분경, 광복단과 의용단 대원들은 3개조로 나누어 거사를 전개했다. 제1조를 맡은 의용단원 김예진과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자, [[문일민]]과 우덕선이 다시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다. 그 결과 평남경찰부의 담장이 무너졌고 유리창이 깨졌으며, 일경 2명이 폭사했다. 한편, 제2조를 맡은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은 평양경찰서 앞에 도착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지만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제3조를 맡은 의용단원 [[여행렬]]과 표영준이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했다. 일제는 민심이 요란해질 것을 우려해 언론통제를 가했고, 이 때문에 2주 후인 8월 19일에야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이후 박태열과 장덕진은 황해도 해주로 가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지만 엄중한 경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서간도로 돌아갔다. 또한 유일하게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문일민과 우덕선도 무사히 귀환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일설에 따르면, 안경신은 25세 때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을 약속한 남자와 함께 중국에 망명했지만 남자는 아편에 중독되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남자의 정체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다.] 안경신은 대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어느 참외밭으로 피신해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 기자림에서 문현철을 만나 폭탄 한 개를 건네받고 거사의 기회를 노렸으나 일제 경찰들의 경비가 심하자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의 최용주의 집에 피신했다. 결사대 제3대는 평북 신의주와 선천방면의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신의주를 맡은 [[이진무(독립운동가)|이진무]]와 [[정인복]]은 8월 15일 밤 9시경 신의주역으로 들어가서 인접한 호텔을 겨냥하고 연결계단 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계단의 일부만 파괴되고 호텔은 폭파되지 않았다. 선천 방면은 이학필, 김응식, 임용일 등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신성중학교 학생 박치의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들은 8월 24일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시위를 촉발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일경의 철저한 감시로 인해 거사 일정이 지연되었다. 다시 9월 1일로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새벽 3시, 박치의는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사형판결을 받은 뒤 1921년 9월 30일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