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공근 (문단 편집) == 생애 == [[1909년]], 진남포 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있을 때 [[안정근]]과 함께 면회를 다녔다. 안중근 사망 직후 러시아로 망명해 안중근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민족 의식을 고취하며 첩자 김정국을 살해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49314|대전일보]]. 1919년 상해 임시 정부에 가담해서 1920년 1월 임정의 모스크바 대사로 활동했고 1921년 임시 의정원(임시 국회) 황해도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교민 단체에서도 활동해서 1920년 12월 상해 한인 거류민단 의사회 의원, 1926년 2월 상해 한인 교민단 단장을 지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부친 안태훈의 절친이었던 [[박은식]] 대통령의 타계를 곁에서 지켰다. 안중근의 형제들은 생전에 부친의 친구이자 양명학, 실학, 성리학의 대가였던 박은식을 부친처럼 모셨다. 1925년 프랑스 불조계 공무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안공근은 김구,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노백린]], [[김규식]], [[김원봉]],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함께 중요한 한국인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있다 한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년 4월, 경인 문화사) 284p) 임시 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과 1931년 조직된 [[한인애국단]] 창단에도 참여해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기획하였으며 임시정부 재무 부문을 담당하여 헌신했고 친일파 암살에도 관여하였다. 김구가 동학 접주로 갑오 농민 전쟁 후 일본군에게 쫓길 때 안공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김구를 숨겨준 적이 있다. 안공근의 형제와 가족은 대부분 임시 정부에서 김구 편에 서서 활발하게 참여하였으며 김구와 사돈으로도 엮였다. 그런데 1937년 상해 사변 때 [[김구]]의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나온 뒤 자기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김구]]는 형수 [[안중근]]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공근을 호되게 질책했으며 그 뒤로 그는 김구와 파벌을 달리해 활동했다. 1939년 5월 상해에서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공근의 딸 안정생의 부탁 편지를 받은 [[쑹메이링]]의 청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경찰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찾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김구]]의 측근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암살했다는 말이 전해지고있다.(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303p) 출처의 오영섭은 안중근의사기념관 연구위원장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446641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