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내양 (문단 편집) == 버스 여차장[* 한자로 [[女]][[車]][[掌]]이다. [[掌]]은 관장·관리·주관하다의 뜻.] == [[파일:안내양.jpg|width=400]] [youtube(xXYtKpTeObo)]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승객과 버스 여차장의 근무 장면. 명동에서 출발해 서울역과 신촌을 거쳐 김포공항을 오가던 [[김포교통]] 소속 42번 버스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안내양 하면 먼저 떠오르는 직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6월 17일 김광옥 [[국토교통부장관|교통부장관]]이 여차장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직업이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의 실시와 더불어 [[안내방송/버스|정류장 자동 안내방송]]과 [[하차벨]](콜부저), 자동문[* 1970년대 후반부터 전, 중문 사양 시내버스가 등장했는데 앞문은 운전기사가 막대식 개폐 레버(혹은 [[자일대우버스 BF|BF101]] 같은 차량에 쓰이는 회전식 개폐 레버)로 여는 자동문 방식이었지만 중문은 안내양이 열고 닫는 수동문 방식이었다.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문은 수동문에서 자동문 방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리어 엔진 버스인 [[자일대우버스 BV|대우 BV101]](1983년 출시)이나 [[현대 RB버스|현대 RB520L]](1984년 출시) 같은 시민자율버스 운행 제도에 맞게 생산한 모델임에도 초창기 도입분의 경우 중문 사이의 안내양 전용 좌석과 중문 막대 스위치가 있었다.]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1983년부터 안내양은 사양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89년]] [[12월 30일]]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 6항의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 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었다. 마지막 안내양은 서울 [[김포교통]]에 있던 38명이라고 한다. 버스 안내양의 역할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었다. 물론 남자 차장도 있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흔치 않았다. 안내양, 여차장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정류장에 가까워 오면 항상 "다음 정류장은 ○○○입니다. 내리실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하고, 출발하기 전엔 버스 옆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オーライ; all right)라고 외쳤다. [[푸시맨]] 역할도 했는데, 만원버스에 사람들을 밀어넣고서 출입문에 매달려 다니다 추락하여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사고가 안내양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곤 했다. 당시 [[버스 기사]]나 승객에게 있어서 많은 편의성을 제공해 주던 직업이었다. 현대의 버스 기사는 운전부터 승객 승, 하차 확인까지 맡아야 하지만 안내양이 있으면 이런 관리적인 부분을 안내양이 보조해주기 때문에 운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버스는 문이 두 개이고 타는 문 내리는 문이 구분되어 있는데, 당시는 문이 하나였거나 두 개일지라도 승차 전용 입구에서 안내양이 돈을 받고서 태워 줬기 때문에 요금 징수를 기사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안내양 폐지 직후에는 버스 운전기사들이 적응을 힘들어하며 피로를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다. 승객에게는 안전한 하차를 보장해 줬는데 아무리 출입문에 거울과 중문 안전 센서가 있어도 인간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출입문 막대 개폐 레버부터 내려 문부터 닫고 출발하려는 막장 기사들도 있지만 이 때는 안내양이 상술된 " 탁탁 오라이~ " 를 하기 전에는 문 닫고 출발하지 않았다. 제복은 위 영상에서 보듯 [[세일러복]] 형태인 것, 단색에 흰 칼라를 달아 여학생 교복과 비슷하지만 바지를 입는 것 등이 있었다. 색상은 진한 감색 또는 연푸른색, 회색 등 회사마다 달랐으며, 원색 도는 근무복과 같은 옷감의 베레모, 빵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옷감은 대개 저렴한 합성섬유 혼방이었다. 헤어스타일은 풀어헤치는 긴 머리는 대개 금지였고, 단발을 하거나 길다면 땋아서 말거나 꽁지머리, 양갈래 머리를 하기도 했다. 대략 당시의 여고생 두발, 복장 규정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나이 대도 여고생들과 별 차이 나지 않았고. 그리고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 진한 화장은 대부분 금지였다. 어차피 당시 버스는 냉난방이 없거나 부실했고, 몸을 쓰는 열악한 노동 환경 탓에 화장 해 봐야 유지도 안 되었고, 귀걸이 등 장신구는 어딘가에 걸려서 다칠 수 있기에 위험했다. 눈썹을 그리고 립글로스 바르는 정도만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예쁜 나이 대이다 보니 종종 미모의 안내양도 있어서, 그 근무 시간대에 맞춰 일부러 버스를 타는 남학생들도 있었을 정도. 그리고 겨울에도 따뜻한 장갑을 낄 수가 없었다. 잔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세어 줘야 했고, 버스표([[토큰]])으로 바뀐 뒤에도 세는 건 같았던 데다가 장갑을 끼면 문 여닫는 핸들을 잡기가 불편하며, 버스 외부의 손잡이에서 손이 미끄러져 차에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갑을 끼었다 벗었다 하거나 돈(버스표)를 받는 손(주로 왼손)만 얇은 장갑을 끼고, 나머지 한 손은 맨손으로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한 손에만 장갑을 낀 모습은 위 동영상 30초 부근에 나온다. 1960~70년대 안내양은 여러모로 애환이 서린 직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인권은 낮았고,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나 이에 대한 사회 인식은 매우 미흡했으며 이 시절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극소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안내양]], [[식모]], [[여공]] 정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초졸 정도의 저학력으로도 가능하며, 돈 말고도 숙식을 별도로 제공받았다는 점. 이 때문에 가족들의 생활비나 형제들의 대학교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아가씨들이 적은 연봉과 빡빡한 노동 시간에 시달려가며 일했다. 요금함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버스 요금을 받으며 현금을 직접 징수하다 보니 계산이 안 맞으면 돈을 훔쳤거나 횡령했다는 혐의 (속칭 삥땅)를 뒤집어 쓰기 쉬웠고 이 때문에 [[버스 회사]] 사장이나 직원에게 알몸 수색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다. 승객에게 성추행이나 성희롱[* 만원 버스에서 몸으로 밀어 승객을 태우는 일도 했기 때문에, 그냥 손만 올리면 되니 안내양 몸 더듬는 건 쉬웠다. 버스는 출발시켜야 하고 사람 사이에 짓눌려 있으니 피할 수도 없고.], 심하면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이나 험담 같은 폭언을 당해도[* 여담으로 이 사례는 1985년 초반 [[MBC 뉴스데스크]]의 [[카메라 출동]] 코너에서 "말투 거친 버스 승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된 적이 있었다(MBC Archive에 있는 영상인데 아쉽게도 1984~1986년 당시 뉴스데스크 방송분 전체가 아닌 카메라 출동 코너만을 모은 클립 영상으로 되어 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하는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승차 거부 등의 파업/농성이 잦았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안내양 농성' 등을 치면 그 사례가 많이 나온다. [[https://news.v.daum.net/v/20210110114801592|이 기사]]를 참조하면 당시 버스 안내양의 근무 환경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80년대 안내양의 애환을 그린 "기름밥"이라는 실화를 근거로 한 소설이 있었는데,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젊은 시절 [[김보연]]이 주연으로 방송된 적도 있다. 드라마판에서는 내용이 삭제되었지만 알몸 수색은 기본이고, 안내양을 관리하는 젊은 중간 관리자의 별명이 "진시황"일 정도로 여러 소녀들을 희롱했다. 안내양이 하던 역할은 전부 기계로 대체되었다. 수동문은 전부 기사가 스위치로 조작하는 자동문으로 바뀌었고 요금 징수는 요금함 및 교통카드 단말기가 맡으며 정류장 안내는 방송으로 하고 하차 요청은 벨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80년대를 끝으로 안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던 [[2006년]]초 [[충청남도]] [[태안군]]의 [[태안여객|농어촌버스]]에서 안내양을 부활시켰다.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 [*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1725973|TV에도 나왔다.]]] 뒤이어 [[2010년]]에는 [[충청남도]] [[보령시]]에서도 안내양을 부활시킨 ‘행복버스’를 도입했다. 이전과는 업무가 바뀌어서 특히 농어촌 지역에 많은 고령 승객의 승하차를 보조하고, 동네 시장에 농작물을 팔러 나가는 노인들의 짐 옮기기를 돕고 있다. 그리고 노인 못지 않게 농어촌에 많이 위치한 초등학교의 경우 학생들 거주지가 매우 넓게 분산 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스쿨버스|통학버스]]의 경우 어린이들의 동승 보호자의 개념으로 어른 1명이 타게 된다. 동승 보호자의 경우 2017년 도로교통법 제53조 제3항 개정에 따라 2017.1.29(일)부터 “15인승 이하 통학버스에도 동승 보호자를 의무적으로 탑승”해야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동승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정의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성범죄 전과가 없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