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 (문단 편집) == 생애 == 안녹산의 아버지는 이란계 [[소그드인]]의 유력자인 것으로 추측되며, 어머니는 [[돌궐]]의 [[무녀]]였다고 한다. 안녹산 가문이 속한 돌궐 부족의 가한이 716년에 죽자 족장의 승계와 다른 부족과의 합병을 두고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고, 안녹산의 가문은 이를 피해 당나라에 망명했다. 이 때 안녹산 가문은 당으로부터 안(安)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안녹산은 인근 부족의 6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호시아랑(互市牙郎)에 임명되었다. 이 호시아랑 직위는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통역사이자 무역관이었는데, 안녹산은 상업으로 유명했던 소그드인 출신답게 이 직위를 십분 활용해서 한족과 국경의 이민족들의 중계무역을 장악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한편 안녹산은 이 시기 당시 유주 절도사였던 [[장수규]]의 눈에 띄어 군인으로 발탁된다. 이후 변방의 수비를 맡아서 나름 군공을 쌓았으며 장수규를 통해 당나라의 중앙 조정에도 연줄을 놓는다. 야심이 컸던 안녹산은 중계무역으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중앙의 관료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려 당 조정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수규가 몰락한 이후에도 중앙조정의 인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다. 드디어 안녹산은 당시 황제였던 [[현종(당)|현종]]을 알현할 수 있었고, 현종은 안녹산의 태도와 능력이 무척 마음에 들어 742년 그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한다. 현종의 마음을 얻은 안녹산은 당시 현종을 사로잡고 있었던 [[양귀비]]의 마음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안녹산은 대뜸 양귀비를 양모로 모시고 그 양자가 되기를 청했다. 문제는 양모로 모셨던 양귀비가 양자 안녹산보다 16년이나 연하였다는 것. 하지만 안녹산은 이런 사안에 개의치 않고 양귀비의 양자로 자처했으며 조정에 들어갈 때마다 일단 양귀비에게 문안인사부터 하고 나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양귀비에게 지극정성을 바쳤던 안녹산의 태도 때문에 안녹산과 양귀비가 사통한다는 추문이 생기기도 했는데, 정사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다 현실적으로도 별로 개연성이 없기 때문에 현재는 근거 없는 루머 수준으로 취급되고 있다.[* 안녹산은 양귀비보다 16살이 많은데다 엄청나게 비대한 체격에 험상궂은 용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양귀비가 이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양귀비와 안녹산이 심상치 않은 사이였다면 측근들을 통해 이런 저런 정보를 보고받고 있던 현종이 안녹산이 계속 조정에서 활개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은 안녹산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744년에는 그를 범양절도사로 임명했으며 751년에는 추가로 하동절도사로 임명한다. 이처럼 평로/범양/하동 세 곳의 절도사 자리를 확보한 안녹산은 이제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최대 군벌로 자리잡는다. 751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나 오히려 패하고, 부장 사사명이 겨우 막아낸다. 하지만 정치 군사 양면으로 승승장구하던 안녹산에게도 걸림돌이 나타났는데, 바로 당시 당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 [[양국충]](楊國忠)이었다. 양국충은 현종의 총희(寵姬) 양귀비의 친척 오빠였으며 752년 라이벌이었던 이임보가 죽은 후 전권을 쥐고 본격적으로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양국충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 그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모함을 했는데, 이에 분개한 안녹산은 755년 실제로 간신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안녹산의 난]]을 일으킨다. 다만 현재는 양국충의 주장이 단순한 모함이 아니라 실제로 안녹산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가 양국충에게 들키는 바람에 성급하게 반란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종 치세 당시의 당나라는 위구르족이나 돌궐족과 같은 이민족 출신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민족 출신에 대한 대우가 기존의 한족 출신들의 대우보다 소홀했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의 불만이 계속 높아져 가고 있었고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에 손을 놓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이런 부조리가 더 심해졌기 때문에 당시에는 언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안녹산 역시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시 당나라 최대 군벌로 성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바로 당 조정에 반기를 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녹산의 난이 시작되었을 당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점이나 반란 초반에 이민족 출신 장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던 하북지역 대부분이 바로 안녹산에게 협력했다는 점 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자세한 것은 [[안녹산의 난]] 항목 참조. 군사반란에 성공하고 [[뤄양시|낙양]]에서 웅무황제(雄武皇帝)에 즉위해 [[국호]]를 연(燕), [[연호]]를 성무(聖武)로 했다. 하지만 당 현종은 [[쓰촨성]]으로 퇴각하고 당 숙종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계속 안녹산과 전투를 치르면서 안녹산의 세력은 지지부진해졌다. 게다가 안녹산은 거병을 한 다음부터는 건강이 나빠졌는데 점점 눈이 나빠지고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실명을 하게 되며 [[궤양]]에도 걸리게 되자 매우 난폭해졌다. 특히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궁인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일을 흔하게 벌여 궁인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나중에는 측근들과 가족에게도 [[폭력]]을 쓰게 되어 측근들과 가족들도 그를 두려워한다. 757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터에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아버지의 난폭함을 말리는 안경서와 갈등이 커지자 안녹산이 2번째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포하여 충격을 받은 안경서가 아버지의 측근들과 합심해서 그를 살해한 것이다. 특히 안경서는 난폭해진 아버지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터라 그 전에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고 안녹산의 측근들도 갈수록 난폭해지는 안녹산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모두 안경서 측에 가담하여 안녹산을 살해하는 것에 동의한 상황이었다. 이 때 안녹산은 항상 곁에 검을 두고 다녔는데 안경서와 측근들, 내관 이저아가 사전에 검을 치운 터라 반격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안경서의 지시를 받은 이저아의 검에 찔려 죽는다.] 하지만 곧바로 휘하 군인이었던 [[사사명]]이 안경서마저 죽이고 계속 군사반란을 이어가면서 내전이 격화되었고 사사명 역시도 아들 사조의에게 암살당해 사조의가 군사반란을 이어갔다가 사조의의 군대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의 공격으로 군이 격퇴당하면서 황제에게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해 763년에 사조의가 자결함으로서 8년 만에 당 제국 최대의 군사반란 및 거대한 내전 중 하나가 막을 내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