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복 (문단 편집) == 생애 == 1712년 현재의 [[충청북도]] [[제천시|제천]]에서 출생했다. 안정복의 가문이었던 [[광주 안씨]]는 당시 [[남인]] 계열의 집안[* 남인에서 날리던 집안은 아니고 그냥 남인 소속. 남인의 거두였으면 안정복의 증조부나 고조부가 [[사또]]랑 종8품 정도에서 벼슬길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 사실 막힌건 [[연산군]] 탓.]으로 그의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예조참의도 역임했지만 이후 [[숙종(조선)|숙종]] 시절의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으로 완전히 중앙 정계에서는 배척당하고 만다. 안정복이 [[청소년]]을 보낼 시절이었던 1728년 [[이인좌의 난]]까지 터져주는 덕에 벼슬길은 영원히 막혔다. 집안이 가담한 것은 아니니 과거를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설사 붙는다해도 평생 한직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컸고 안정복 본인이 [[벼슬]]을 단념하고 살면서 한번도 과거를 응시조차 하지 않는다. 이후 성호 [[이익(실학자)|이익]] 밑에서 수학하며 이익의 [[실학]]과 [[성리학]]에 영향을 받게 된다.[* 흔히 사람들이 실학자는 성리학자랑은 양립 불가능한 관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잦은데 시대 특성상 실학자들도 성리학자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기는 했다. 단지 성리학을 절대 신봉하지 않았으며 실생활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는게 차이일 뿐이다.] 실학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안정복의 유학관은 보수적이어서 [[스승]] 이익과는 달리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가 주자대전을 편찬할 때 불러들인다거나 [[정조(조선)|세손]]의 스승 가운데 1명으로 발탁하는 등 정통 성리학자의 면모만 두드러진다. 안정복이 이익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역사학이었는데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이라는 사관은 이익을 통해서 탄생하고 안정복에 의해 초석을 다졌다는게 일반적인 평가. 안정복과 이익의 자주적 역사관의 정수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스승과 함께 만든[* 이익이 쓴 항목은 없지만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줬다. 이거 만들 때 돈이 없어서 굶으면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도 동사강목에 대해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1급 [[사료(역사)|사료]]는 얻어보지도 못하고 그나마 얻은 자료도 제책 수준이 형편없어서 [[해석]]을 잘못한 부분도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저서 [[동사강목]].[* 거의 20년에 걸친 평생의 역작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독립운동]]하러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유일하게 갖고 갔던 것.] 30대 후반에는 [[음서]]로 관직에 나가서 [[사헌부]]에서 근무하기도 하지만 부친상을 당하기도 했고 젊어서 고생[* 아버지가 전답을 다 팔아서 [[노비]]랑 같이 숯을 구워서 그걸 팔아서 먹고 살았을 정도.]을 너무 해서 본인의 [[건강]]도 좋지는 않았던터라 곧 [[사직]]했다가 복직하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주자대전 간행이나 세자시강원을 역임한 것이 이 시기. 노년 이후에는 남인 계열을 중용했고 자기가 가르치기도 했던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하자 [[인생]]이 펴서 노년에 지방 [[사또]] 자리를 맡기도 하다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인 1791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