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직전쟁 (문단 편집) === [[호법전쟁]] === 1915년 12월 12일, [[북양군벌]]의 수장 [[위안스카이]]는 황제병에 걸려 [[홍헌제제]]를 단행,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3월 23일 제제 취소 후 6월 6일 사망했다. 위안스카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북양군벌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하는 안휘파, 즉 환계와 부총통 [[펑궈장]]을 중심으로 하는 직례파, 즉 직계로 갈라져 대립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호국전쟁 이후 남방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은 서남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1917년 연합국의 세계대전 참전 요구를 구실로 삼았다.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의 차관과 무기를 얻어 무력을 강화하고 싶었고 이 때문에 <대독절교안>과 산동반도의 독일군의 동진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대독선전안>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가 말을 듣지 않자 [[장쉰]]과 결탁하여 대총통 [[리위안훙]]과 국회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계획은 장쉰이 [[장훈복벽]]이라는 막나가는 왕정복고를 단행하면서 틀어졌으나 어쨌거나 돤치루이는 장쉰을 진압하고 다시 국무총리에 올라 최고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최고권력자로 등극한 돤치루이는 장쉰이 해체한 국회와 약법의 부활을 거부하며 안복구락부를 이용해 어용국회를 만들었으며 매국적인 [[니시하라 차관]]을 들이는 등 일본에 영합하여 독재와 무력을 강화했다. 이에 반발한 [[쑨원]]과 중화혁명당은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917년 9월 1차 광동정부를 수립하고 [[1차 호법운동]]을 주도하며 돤치루이의 독재를 비판했다. 돤치루이는 남방의 독립적인 상태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남북분열은 지방군인들로 하여금 투기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얻게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여 국정을 좌우하도록 만들었다'라는 것이 돤치루이의 생각이었는데, 즉 군벌들이 할거하고 군인들이 정치에 간섭하는 당시 중국의 상황은 남방과 북방이 통일되지 않고 따로 놀아서 그런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고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돤치루이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돤치루이는 쑨원 체포령을 하달하여 1917년 9월 [[호법전쟁]]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