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직전쟁 (문단 편집) === [[장쭤린]]의 마지막 중재 === 1920년 6월 19일 장쭤린이 전용열차 베이징에 도착, 쉬수정과 군, 경 ,정 각계 장관들의 영접을 받았다. 안복계의 교통총장 증육준이 봉천회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장쭤린을 위한 관저를 마련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봉천회관에 머물지 않고 봉군사령부에 숙소를 정한 후 쉬스창, 진윈펑, 돤치루이를 차례로 만나 상호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뜻을 전했다. 6월 20일, 쉬수정이 장쭤린을 찾았으나 장쭤린은 핑계를 대며 쉬수정의 면담을 거절했다. 장쭤린은 환계의 등쌀에 못 이겨 사퇴하려는 진윈펑 총리의 사퇴를 만류하는 한편 6월 21일 돤치루이를 찾아가 진윈펑을 복직시키고 쉬수정을 더 이상 비호하지 않음으로 명망을 유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자신이 쉬스창을 반대하지 않으며 진윈펑에겐 복직을 권하겠다고 동의를 표했다. 6월 22일 장쭤린은 왕내빈, [[장징후이]] 등의 심복을 거느리고 8개 성의 대표와 함께 바오딩에서 차오쿤, 우페이푸와 회담했다. 차오쿤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장쭤린을 크게 환대했고 장쭤린은 시국 해결을 위한 5개 방안을 제시했다. ||1. [[진윈펑]]의 복직 2. 내각의 국부적 개조(즉 안복계가 장악한 재정, 교통, 사법 총장의 교체와 농상, 외교, 교육총장의 교체) 3. 상해화의 대표의 해임과 화평회의 취소 4. 안복계 해산 5. 쉬수정의 병권 박탈, 주변사관제 취소. 변방군은 개편 후 육군부 직할로 둠.|| 6월 23일, 바오딩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회의 결과를 쉬스창에게 보고하고 쉬스창과 장쭤린은 이를 채택하기로 잠정 결정, 다시 돤치루이와 회담했다. 돤치루이는 장쭤린과 술을 마시며 자신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이 없으니 장쭤린에게 부총통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장쭤린을 구슬리려는 시도였으며 돤치루이는 쉬수정의 병권 해제 부분은 어렵다고 밝히며 재정과 교통계는 안복계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쌍방의 입장 차가 커서 조정은 진전이 없었다. 6월 25일과 6월 27일 바오딩에서 직계 장령들이 진윈펑 복직, 안복 3총장 퇴진, 쉬수정 주변사 면직, 변방군의 육군부 소속 등을 요구하는 통전을 올려보냈다. 이 통전에서는 돤치루이엔 악감정이 없지만 쉬수정만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돤치루이에게 쉬수정은 수족과도 같은 심복이었기 때문에 돤치루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6월 29일 쉬스창, 돤치루이, 장쭤린이 모여 회의를 했다. 쉬스창은 안복계 3총장은 사퇴하되 내무와 해군총장은 유지하며 외교,농상,교육총장을 유임시키고 진윈펑을 해임시켜 육군총장에 임명하며 주수모를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쉬수정을 면직하고 변방군과 서북군을 돤치루이의 휘하에 두는 대신에 쉬수정의 주변사 직책은 유임시키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돤치루이는 일부러 반대 표시를 하지 않았으나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총리가 누가 되는지는 상관이 없으나 쉬수정의 병권 박탈과 안복 3총장의 해임을 재차 요구했다. 6월 30일 돤치루이는 환계 회의를 열었으나 쉬수정 등은 직계의 요구에 강력히 반발했다. 장쭤린이 다시 돤치루이를 설득하려 했으나 돤치루이는 일개 사단장에 불과한 우페이푸가 주제 넘게 간섭하는 일 때문에 중앙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우페이푸를 비방함으로 강경한 반대의 뜻을 전달했다. 이 시점에서 중재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렇게 보면 돤치루이가 과욕으로 억지를 부린 것도 같지만 호법전쟁으로 남북 무력통일이라는 환계의 목표가 좌절된 상황에서 안복계와 변방군이라는 군사,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환계 입장에서는 최소목표였다. 문제는 이 '최소목표'부터가 다른 군벌들 눈에는 심각한 무리수였다는 거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