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직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시작 === 7월 8일 새벽 1시에 톈진에 도착한 장쭤린은 달려가 차오쿤, 우페이푸와 긴급회의를 가졌고 다시 봉천으로 돌아갔다. 봉천역에 돌아온 장쭤린은 "다시 돌아왔구나!"라고 외쳤고 일단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표명일 뿐이었다. 한편 7월 8일 돤치루이는 단하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와 장군부에서 주요장관, 국무원, 참모총장, 위수사령, 경찰총감 등 100여명의 정부요인을 모아회의를 개최,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탄핵하고 직계를 토벌하자고 결의했다. 회의 직후 돤치루이는 강경한 어조의 공문을 올려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죄상을 비난하고 대총통 명의로 차오쿤, 우페이푸, 조영 등 3인의 관직을 박탈하고 체포하여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7월 9일, 돤치루이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던 쉬스창에게 우페이푸의 사단장직을 면직하고 육군부에서 징계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우페이푸는 육군 중장직과 훈장을 박탈하고 육군부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하며 제3사단은 육군부에서 접수한다. 차오쿤은 면직시킨다.|| 돤치루이는 변방군 3사단을 란방으로, 변방군 1사단과 육군 9사단, 13사단, 15사단을 장신점, [[루거우차오]], 고비점으로 파견하여 단하에 정국군 총사령부를 설치, 스스로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쉬수정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당연히 직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7월 9일 오전, 톈진에서 차오쿤이 궐기대회를 열고 오페이푸를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우페이푸가 선언했다. >"삼군을 몰고 가 [[베이징|신경]]으로 진격하여 돤치루이를 몰아내고 쉬수정을 주살하자! 우리 군의 이름으로 적을 토벌하자!" 바오딩에 직계군 대본영이 설치되고 고비점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직계군은 우페이푸의 3사단, 소요남의 3혼성여단, 염상문의 2혼성여단, 조예의 3혼성여단, 왕승빈의 직계1혼성여단 등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우페이푸는 <돤치루이의 죄상 폭로>, <직군이 변방 서북군에게>, <직군 병사가 돤치루이군에게 충고하는 글> 등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거병 이유를 선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은 자고이래 외국의 방비에 엄격했다. 매국보다 더 큰 죄가 없고 외세에 아첨하는 것처럼 추한 일은 없다. 간신들의 흉악함이 극에 달했는데 돤치루이는 국정을 농단하고 적을 어버이로 여기고 있다. 일본에 크게 차관을 일으킨 매국노이며 동포에게 가혹했다. 계속 전투를 일으켜 일본군의 훈련을 도와 적군을 이롭게 했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을 불러오고 다른 나라 돈을 쓰고 다른 나라 물자를 들여왔다. 이것은 우리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신황 자손의 맥을 끊는 것이다. 적국에 충성하는 것은 우리 민국에 반역 행위다!|| ||우페이푸 등은 머리 땋고 글을 배울 무렵부터 대의를 말해 왔다. 우리는 군사를 일으켜 몸을 나라에 바치려 한다. 맹세코 [[장방창]], [[석경당]], [[유예]], [[오삼계]]와 같은 무리들과는 한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적이 살면 내가 죽고 적이 죽으면 내가 산다.|| ||금일의 전투는 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하는 전투며 중국 민족을 위한 전투다.|| 7월 9일 장쭤린 역시 자신이 산해관을 넘어 직계군을 도울 이유에 대해 <장쭤린의 파병 입관>, <돤치루이는 쉬수정을 비호하지 말 것>, <장쭤린의 거병>, <돤치루이의 음모를 폭로함> 등의 전보를 보내 선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쭤린은 백성을 보호하고 노선을 지키고 정의의 군대를 구원해야 한다. 지금 실제의 상황이 이러므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의분에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우리 군이 파병하여 입관하므로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다.|| 7월 10일에도 다시 입장을 발표했다. ||쭤린은 노심초사하여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시대에 역행하는 무리들이 있어 나라가 걱정된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공적이다. 친히 부대를 이끌고 나라의 화근을 제거하여 장애물을 없애고 우리 민족을 위난에서 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총통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고 독판 앞에 나아가 만천하에 사죄하리라.|| 장쭤린은 7월 12일 길림, 흑룡강의 독군들, 봉천군 총사령관 [[장징후이]]와 [[우쥔성]] 등을 불러 관내출병과 직계와의 동맹을 결정했고 장쭤샹의 27사단과 장징후이의 28사단에서 1개 여단을 차출하여 경봉철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입관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통전했다. ||봉천성의 정보에 의하면 베이징에서 요보영 등 13명을 동북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친필 자술서에 보면 증운패에게 정국군 제3군을 맡게 하고 대양 12만원을 주어 동북으로 와 마적 등을 모집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산속이나 중동 노선 일대에서 소란을 피워 봉군으로 하여금 안의 일에 신경 쓰느라 쉴 틈이 없게 하여 봉천 병력을 견제하려 했다고 한다. 이미 환계는 간특하게도 동성을 유린하였다. 이것이 내가 출병하려는 이유다. (...) 쭤린의 이번 출사는 민국을위해 간당을 제거하여 수도의 자유를 회복하고 국가 원수의 신변 자유를 회복하고 도탄에 빠진 근기 지역 수백만 인민들을 구하고자 함이다. 만일 국난을 당하여 악의 무리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맹세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7월 13일, 장쭤린은 총동원령을 내려 7만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을 통과했다. 돤치루이는 7월 10일, 총공격 명령을 하달, 7월 14일 환계군이 경한철로 연선을 따라서 진격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안직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이틀 동안 환계군은 서로의 경한철로 연선을 따라 직계의 방아선을 돌파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직계는 주요 요충지를 잇달아 상실하고 후퇴했다. 7월 15일 동로의 양촌에서도 환계군이 승리하여 직계군이 후퇴했다. 하지만 7월 16일 봉천군대가 본격적으로 가담하며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