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지역감정]] === 《[[윤치호 일기]]》의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 지방|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평안도|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 감정을 놓고 "지역 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안창호는 [[한용운]]에게도 "독립 후에는 서북파가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서북파는 그간 박대받아 왔고 기호파는 지난 500년 간 지은 죄가 크다"라는 내용의 지역 감정을 피력한 적이 있으며 이에 실망한 한용운이 다시는 안창호를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는데([[https://books.google.co.kr/books?id=EDWzBQAAQBAJ&pg=PT337&lpg=PT337&dq=한용운+안창호+기호&source=bl&ots=SqjVcixXiS&sig=ze0zc4VlcU2dg0mTwta8_rOHMF8&hl=ko&sa=X&ved=0ahUKEwjgxJmoy-_TAhWBErwKHTqfCDMQ6AEINjAD#v=onepage&q=%ED%95%9C%EC%9A%A9%EC%9A%B4%20%EC%95%88%EC%B0%BD%ED%98%B8%20%EA%B8%B0%ED%98%B8&f=false|#]]) 정도를 떠나 서북민으로서의 울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윤치호 일기>는 오류 투성이여서 문제는 안창호가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대전광역시|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1935년에 풀려났다는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장이었고 여기에 엉뚱하게 신흥우가 나온 것도 상황처리 앞뒤가 맞지 않다.[* 윤치호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적은건지, 알 수가 없다.] 신흥우는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름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인물로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신흥우는 이 시기 윤치호와 대립이 심했다가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게 된다. 하지만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 일기> 내용만 가지고 선후맥락없이 판단할 경우 오류가 될 수 있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사실 안창호가 지역 감정의 소유자라는 이야기를 윤치호가 들은건 1920년 8월 30일, 1921년 5월 2일, 1924년 3월 4일, 1931년 1월 8일 <윤치호 일기>에서도 나오는걸 봐서 당연히 1932년보다 이전에 해당될 것이다. 실제로 1932년 7월 15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오후에 안창호가 수감되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고 윤치호 자신이 "안씨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에 [[김활란]]이 분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즉, 안창호가 감옥에 수감 중인 상태라는건 본인도 당연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글을 썼을 것이다. 또한 <윤치호 일기>를 보면 "안창호가 지역 감정이 섞인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지, 그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도 않다. 안창호가 출옥 후 1935년 3월 24일에는 윤치호가 직접 방문하여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있는데 안창호는 이 자리에서 "나는 지역 감정 소유자가 아니며 오히려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었다. 안창호와 윤치호 관계를 보면 지어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지금에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위인과 [[친일반민족행위자]]지만 윤치호도 안창호와 함께 수십 년간 [[개신교]] 활동 및 계몽 활동에 투신하였고 윤치호는 안창호의 석방과 병[[치료]]는 물론 안창호의 장례까지 치루어준 오랜 친구로 낭설 따위로 오해를 할만큼 거리가 있는 사이가 아니다. 한용운의 일화와 <윤치호 일기>를 종합해 볼 때 과거에는 강한 지역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늦어도 1935년에는 지역 감정의 문제점을 느끼고 타파하려고 개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