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기타 == * 사진속 세련된 도시미남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안남도]] 출신이라 [[서북 방언]]을 썼다고 전해진다. 다만 1919년 9월 28일에 안창호와 직접 대면한 이병상에 따르면 말씨에 경성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사진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찍힌 사진이고, 이후 고된 타지 생활과 오랜 독립운동,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홍커우 의거로 붙잡혔을때 사진을 보면 엄청 초췌하고 깡마른 모습이 두드러진다.[[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2941776?type=main|도산의 다른 사진들]] * 안창호 선생의 장남인 [[안필립]]은 장성하자 미국에서 [[영화]] 배우로 성공한다. 그리고 [[LA]]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이름을 남긴 첫 번째 [[한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안창호는 안필립의 배우 생활을 지지했다고 한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한국 또는 조선이란 나라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일본인 배역도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안창호는 예술은 별개로 봐야한다며 장려했다고 한다. * 안창호의 연설은 매우 뛰어났다. 젊었을 적 [[독립협회]]의 관서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힘쓸 무렵, 평양 쾌재정[* 지금의 [[김일성광장]] 자리로, 경북 [[상주시]]의 그 쾌재정과 다르다.]에서 교육진흥을 주제로 하여 '대국민계몽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연설에 크게 감명받고 독립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오산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이승훈(1864)|이승훈]]이다. [[조만식]]과 [[여운형]]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승훈, 조만식, 여운형 모두가 말빨(?)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말빨로 꼬셔버린 것이다.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도산공원]]과 그 일대의 도로인 [[도산대로]]는 그의 호를 따서 만든 공원과 도로명. 그곳에는 안창호 부부의 묘소와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있다. [[http://www.ahnchangho.or.kr|참조]]. * 호인 도산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를 보고 지은 것이다. 섬 도에 뫼 산 해서 도산. 그래서 미국 본토 근처에도 못갔는데 하와이 보고 벌써 미국에 압도당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파일:/pds/201002/24/75/f0020275_4b84fd443d819.jpg]] * 안창호 선생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도 있다. [[https://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95545904|#]] 책 제목이 굉장무쌍하다. * 2000년대 후반에 안창호 선생이 한국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론을 타고 알려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민 집계는 일본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했는데, 안창호는 이걸 하지 않아서 집계가 안 되었고, 결과적으로 훈장까지 받은 독립유공자면서도 한국 국민은 아닌 황당한 상황이었다. * 현재 공식적으로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불명인데,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다만 애국가 작사로 추정되는 시기에 안창호와 윤치호가 서로 만나 협력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중에 애국가 가사를 어떻게 쓸것인지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이 있으며, 1907년에는 대성학교를 공동설립했는데 특히 안창호가 애국가 제창을 특히 강조했다는 것을 보면 윤치호작이든 안창호작이든 서로의 영향이 일정부분 있었을걸로 보는게 옳다. [* 당시 같이 활동하던 안창호와 윤치호가 공동 작사했으나 서로 합의하에 의도적으로 당시 명망가인 윤치호 이름으로 발표했으며 이후에는 국내외 정세 때문에 서로 애국가 작사의 전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까지 왔다는 공동작사설이 있다.] * 도산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합중국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안수산 여사가 해군에 입대한 시기는 [[진주만 공습]] 직후였기에 아시아계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도 있어 퇴짜를 맞았지만 기어이 입대했다. 왜 자원입대를 했느냐에 대해 이유를 묻자 '아버지께서 하시던 싸움을 이어가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전역 후에는 [[1959년]]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 '''[[NSA]]'''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2005/04/20050438.pdf|출처.]]]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별세하였다. [[https://ytn.co.kr/_ln/0104_201506260202515248|기사.]] 향년 100세. 안수산 여사가 23살 시절에 도산은 별세했는데 생전 딸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라면서 "그래도 뿌리인 조국을 잊지는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건국절을 연거푸 언급하면서 건국절 제정을 바란다는 의중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이에 발맞추어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하며 논란을 키웠다. [[건국절 논란]] 참고. 새누리당에 건국절에 대해서 강의하는 이가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라는 작자인데, '''"안창호는 미국인"'''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망언을 터트린 전력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2017728|관련기사]] * [[2016년]] [[8월 20일]] 방송된 [[무한도전 캘리포니아 L.A.|무한도전 LA 특집]]에서 날림관광으로 잡은 코스인 코리아타운 IC, 남가주대(USC) 한국학연구소, 우체국, 한인회관[* 회관은 기념관이며 그 앞의 광장]에 다 그의 이름('''Dosan Ahn Chang Ho''')이 붙어있다. 또한 도산의 자녀 5명 중 2022년 2월 26일 별세한 만 95세(2022년 기준)의 막내아들 안필영 옹이 출연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체포되어 구금생활 후 세상을 떠났기에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안필영은 1926년 9월 28일생이고, 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보다 12년 뒤인 1938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복자가 아니지만, 안창호 선생이 안필영이 출생하기 전부터 투옥되어 사망 전까지 구금생활을 했으므로 12년간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가끔 책 등에서 말하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인 케이스이다. 안창호, 이혜련 부부의 늦둥이이기도 한데 형님들, 누님들과도 나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큰형님 안필립이 1905년생으로 무려 21살이나 차이나서 안필영이 말하기를, 큰형님인 안필립이 자신의 아버지 구실을 했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안필선(1912년생)하고는 14살, 안수산(1915년생)하고는 11살, 바로 위 누나인 안수라(1917년생)하고도 9살이나 차이가 났다.] 부자 둘 다 서로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임으로써 안타까움을 더한다. 장녀 안수산 여사의 아들이자 도산의 손자인 필립 안 커디도 나왔다.[* 이때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인 도산의 다섯 [[파이프 담배|곰방대]] 중 가장 작은 곰방대에 담배를 담는 통이 없는 까닭이 밝혀졌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이 분이 몰래 빼내신 것이었다. 이후 엄마 안수산은 악의 없는 아들을 보고, 크게 웃을 뿐 혼내지는 않았다는 듯하다. 다행히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데 무도 멤버들한테 도산의 붓글씨 배달을 부탁했지만 곰방대는 끝끝내 가지고 계시겠다고 한다.] *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원래는 망우리 묘지에 있었던 까닭은, 그곳이 흥사단 동지인 태허 유태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며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과 동기이다.] 선생이 안장된 곳이라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1973년에 [[도산공원]]을 개장하면서 안창호 부부의 묘를 도산공원으로 이장하고 묘비를 새로 세웠다. 망우리 묘지에 있던 비석 역시 도산공원 안에 있는 도산기념관 지하로 옮겨 보관하다가, 2016년에 망우리 묘지의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웠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시절에 ''''도산 안창호 씨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씨'라는 호칭은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로,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바꿔 말하면, 위의 상황은 대선 '''후보'''를 얼마만큼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대통령 선거 후보는 공직선거법 등 제도로써 규정되며 불체포 특권으로 신분 보장까지 받는 만큼 단순히 사인(私人) 신분으로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정치인 이명박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언어 사용 면에서만 보면 옳게 제대로 쓰인 용법일 수 있다. * 2018년 8월 20일, [[대한민국 해군]]은 3,000톤급 국산 재래식 잠수함 프로젝트인 [[KSS-III]]의 1번함을 <도산안창호>라 명명한다고 밝혔다. 각 함종의 1번함은 네임쉽으로서, 이로서 KSS-III은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으로 불리게 된다. 2018년 9월 14일 거행된 도산안창호함 진수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임석하였고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 부부도 귀빈으로 초청되었다. * 2018년 8월 14일에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기로 하였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 미국 최초의 한인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의 공로와 더불어 그의 독립 운동 정신 등을 인정하여 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0270803|관련기사]] * 안창호 vs [[이승만]]은 광복 이후에까지 남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안창호는 [[8.15 광복|해방]]을 미처 못보고 별세했으나 안창호와 가깝던 [[여운형]]과 수양동우회 소속이었던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적이 되어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운형은 암살을 당하고 최능진은 [[조선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 안창호의 '[[기독교입국론|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양성]]"이라는 노선은 지금도 평가되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당장 그가 설립한 [[흥사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 단,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며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실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안창호도 그래봤자 자치론자 아니냐며 까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안창호는 자기와 엮이는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광수의 후손은 안창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이광수를 변호하고 있다.]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이광수 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참고해두자. * 부인인 [[이혜련]]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첫아들이 돌을 맞이한 직후에 한국에 다니러 온다고 가더니 통 돌아오지를 않아서 언제 오냐고 장문의 편지를 썼더니 길이가 두 배나 되는 편지가 답장으로 왔다고 한다. 요지는 지금 조국의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찌 동포를 버리고 미국으로 갈 수 있겠냐는 것. 심지어 맨 마지막 줄에는 '''그럼 내가 어쩌면 좋겠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할 말이 없었던 이혜련 여사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덤으로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평생 안창호가 사온 아이 옷은 유독 예뻐했던 둘째딸 수라의 아기옷 딱 한 벌뿐이었다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31000329208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3-10&officeId=00032&pageNo=8&printNo=5656&publishType=00020|1964년 이혜련 여사의 인터뷰 기사]]) * 처음으로 항공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항공기를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항공선구자였으며, 그래서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임시정부 자체 조종사 양성, 비행부대 조직, 항공기 구매 등 임시정부 자체의 항공력을 양성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해서 공군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 2022년 2월 26일 막내인 안필영 선생도 97세에 나이로 [[https://www.yna.co.kr/view/AKR20220228059300075?input=1195m|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자녀들이 고인이 되었다. * 그의 사후인 1988년 [[경신고등학교(서울)|경신고등학교]], 2013년 [[연세대학교]]가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이는 도산 안창호가 [[구세학당]]에서 3년 동안 수학했던 배경 때문이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은 1905년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5년에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치한다. 이 대학부는 2년 뒤 [[연희전문학교]]가 되어 해방 후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였고, [[경신학교]]도 해방 후 [[경신고등학교(서울)|경신고등학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https://www.yonsei.ac.kr/sc/intro/pressrel.jsp?article_no=99834&mode=view|#]] * 사회주의 계열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가"로 평가했다. 임정 초기부터 사회주의 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동휘]]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다. 특히 1920년대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지식인과 기업인들이 주축이 된 운동들은 당시 식민지의 조선인들은 생존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었는데 국산품 수입품을 따지고 자시고 할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에 좌익 계열이나 민중 사이에선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안창호는 주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비롯한 소위 지식인과 부르주아 운동 노선의 좌장격이었다. 혁명이나 일치단결을 통한 민족 독립혁명을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에 대한 전략은 거의 없었다. 대단결을 주장했다 하여도 사회주의의 통일전선 전술이나 1930년대에 반파시즘을 위한 연합전선 개념이었던 [[인민전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창호는 민족 혁명이나 보수주의적 혁명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정이나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적 원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다. 물론 대부분의 초기 독립운동가들이 정치적인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하더라도 당대의 민족 지도자로 손꼽히던 인물이 이러한 부분에서 명확한 이론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여운형]], [[조만식]], [[조소앙]] 등과 무리없게 지낸 점을 보아[* 여운형과 조만식은 사실상 안창호와의 만남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고 안창호에게 항상 호칭을 도산 선생님이라고 불렀을만큼 인생 스승에 가깝게 모시면서 안창호와 상당히 절친하였다. 조소앙의 경우는 임시정부 때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한 계파에 속한 일이 있어 완전히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좌익 계열이나 민주 계열 자체를 배격하진 않았고 그 계열도 안창호를 배격하진 않은 듯하다. [[김일성]]이 쓴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1927년 당시 안창호가 길림의 재중동포들을 찾아 강연을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안창호는 실력양성만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조선 민족의 후진성을 이야기 하며 수양만을 강조했다고 '''깐다.''' 김일성은 이때 자신이 질문지를[* 질문지의 내용은 "산업과 교육으로 실력을 배양하자고 하였는데 왜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힌 상황에서 그것이 어느 선까지 가능하겠는가. 조선 민족이 열등하고 정신수양이 낮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영국과 미국을 반드시 본받을 필요가 있는가. 조선은 영, 미의 원조를 받아 독립할 수 있는가."였다고 한다.] 적은 쪽지를 안창호에게 건넸고 안창호는 자신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하여 급히 자리를 떴다고 한다. 물론 한국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신빙성이 없다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강연은 청중이 너무 많아서 연소자들은 입장불가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당시 15세였던 김일성은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강연 내용을 따로 전해들은 것을 차후에 비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런데 안창호와 김일성은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손정도]] 목사는 임정 의정원에 있었고 실제로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다.] 여하튼 이러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대 독립운동가들은 안창호를 "독립 조선의 대통령감"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신도 그의 인품과 신력은 인정하는 점을 들어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김일성도 서북 출신이고 안창호도 서북 출신이어서 어느 정도 우호적으로 기술한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김일성은 항상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자신의 동향 사람들을 혁명의 주체로 표현했다.] 왜 [[사회민주주의]] 항목에 안창호가 분류되어있나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체계적인 이념으로 발전하지 않긴 했지만 안창호는 분명 '''대공주의'''라는 이름의 미래 지향에 관한 연설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사회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자본주의]]도 사회민주주의의 친척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실상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그 방향성을 잡을 때 공평 분배를 선택하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고 능력별 분배를 선택하면 자본주의가 되는것이다.] 이 대공주의는 후일의 [[삼균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위한 것이었는데 개인과 개인간의 경제적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