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해외 항일운동 (1910~1920년대) === 하지만 [[일본 제국|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평안도|서북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 양성을 주장했고,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출국해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 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흥사단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 중이다. [[보이스카우트]], [[한국청소년연맹]] 등과 같이 일선 중학교·고등학교에 동아리 형식으로 흥사단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후 [[박용만(1881)|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 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는데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 초창기에 [[이승만]]이 당시 임시정부에 없는 직함인 대통령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이는 헌법 위반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말라"고 전보를 띄웠으나, 도리어 이승만에게 "지금 이러면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니 떠들지 마시오."라는 답장만 받았다. 당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은 그러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을 함께 적어 안창호에게 답장했다.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그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고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 대표로 정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로 가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 사건|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를 할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신채호]]가 주동이 된 이승만 반대 운동이 임시정부 안팎에서 격렬히 진행되었다. 안창호는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했으나[* 애당초 위임통치 청원사건이 안창호도 참여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이승만 반대파가 이승만을 축출하려고 하자, 안창호는 자기도 찬성했으니 나부터 축출하라고 나서서 이를 막기도 했었다.] 후에 독립운동 노선을 바꾸었고 이승만 반대편에 섰다. 이 대립은 각 인맥을 타고 격렬한 암투로 발전했다.[* 한편 [[여운형]]은 출신지로 보면 이승만의 기호파일듯 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창호의 서북파로 분류되었다. 젊을 때부터 안창호를 가장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이 여운형이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말도 잘하고 여러 사람과의 교류에 능한 사람인데, 안창호를 지지하는 말을 자주 하다보니, 이는 김구와 이승만이 여운형을 싫어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안창호와 치열하게 싸운 이승만은 안창호 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대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자신의 비서가 여운형과 사이좋게 지내자 '안창호 똘마니와 놀러다니지 말라.'고 혼냈고, 서북 지역 출신을 폄하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창호도 이승만을 비롯한 기호파들을 적대시하였고 이승만이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못한 틈을 타 임시정부 내에 안창호파가 득세하면서 결국 이승만은 탄핵당했다. 1920년대 초반 임시정부 내부의 대립이 극심해서 옹호/개조/창조라는 3개 진영이 생겨나 극심한 대립을 벌인 적이 있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서서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1923)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 탓에 [[이승만]], [[김구]]와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이였으니 안창호와 대립했고,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후부터 김구는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 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에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 운동을 하였다.[* 오영섭,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회 35, 2015, 244쪽]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갈등과 대립하였다.[*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검구, 도산사상연구 8, 2002, 184~188][* 통념과는 달리 김구는 이승만과 오랫동안 같은 진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두사람은 사적으로도 1살 아래인 김구가 이승만을 형님으로 부르며 서로 호형호제했을 정도로 가까웠고, 광복 후에도 신탁통치 반대를 주도하는 등 한동안 같은 편이었다. 둘이 갈라선 것은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의 수용 여부에 따른 결과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2년에 체포되어[* 안창호가 체포된 것을 살펴보면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했었을 때 [[김구]]는 윤봉길의 의거 하루 전에 상하이 내에 있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들에게 미리 통보하며 잠시 피신할것을 알렸다. 다만 안창호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는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이 개방적인 조직이라 자칫 잘못하면 비밀이 샐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의거 당일 아침에는 안창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사람 여럿을 보냈는데, 하필 모두가 전부 길이 엇갈려 안창호를 만나지 못하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윤봉길은 체포된 뒤 일제 헌병대의 심문에 의거에 사용한 폭탄을 독립운동가 [[이유필]]에게 받았다고 진술하였고, 일제 군경은 이유필의 집을 급습하여 조사하게 되나 이유필 역시 미리 피신하여 집에 없었다. 그러나 하필 이 날 이유필의 아들에게 볼일이 있었던 안창호가 일제 군경이 조사중에 있던 이유필의 집에 방문하였고, 안창호가 제발로 찾아오자마자 즉시 그를 체포했다. 사전에 여러명이 피신을 권유하는 전갈을 보냈으나 모두 길이 엇갈려 소식을 알지 못하였고, 하필 윤봉길이 조력자로 진술하여 일제 군경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있던 이유필의 집에 마침 또 볼일이 있어 제발로 찾아가서 체포당한, 기가막힌 불운이다.] 국내에 압송돼 5년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