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국내에서 (1930년대 초-중반)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95%88%EC%B0%BD%ED%98%B8%EC%84%A0%EC%83%9D_%EB%A7%90%EB%85%84.jpg|width=500]] || || 1935년의 안창호.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보산의 송태라는 곳에 집 한 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검문하는 [[일본 제국 경찰]]들을 피해가며 그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평양시|평양]]에서 신사 참배 문제로 평양 교회와 [[숭실대학교|숭실학교]]의 존폐 문제가 벌어지자 평안남도 도지사 가마우치 시코사쿠는 안창호에게 한 경찰을 보내어 전했다.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의논하다가 안창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 의견을 취하니, 당신이 음모를 꾸미거나 선동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평안남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평남을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라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내가 주선해 주겠소. 그러자 안창호는 이렇게 답하며 그 경찰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지사께 전하시오. 만약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시킨다면, 평남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 가두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 [[파일:Ahn_Chang-ho_1937.jpg]] ||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안창호[* 순국 4개월 전인 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 남아 있는 사진 중 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다.] || 아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당했을 때 [[서울특별시|경성]]지방법원 검사의 심문에 답한 것이다. >검사(이하 검):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안창호(이하 안):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안: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소프트 파워|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이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서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현대 국제사회가 성립된 이유다.''' 막대한 군비를 들여 가며 관리해야 하는 수천만 수억의 국민보다는 그냥 무역 대상으로 삼아서 돈이나 벌어다 주는 다른 나라로 만드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인들의 인식이 깨어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불거졌으며, 결국 다수의 신흥 독립국가들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국제사회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그의 사상과 신념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저 대한의 독립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더 나아가 한일 양국의 평화까지 담긴 명언. 실제로 (국민감정은 차치하고) 우호국가로서 서로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발전하고 있는 현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이시바시 단잔]] 동양경제신보 논설위원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강경한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대만, 조선, 만주를 모두 독립시켜주고 대등한 관계에서 우호적으로 무역을 하는 가공무역국가로서의 소일본론"을 주장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