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창호 (문단 편집) === 사망 ===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37년 12월 [[윤치호]]의 여러 번에 걸친 탄원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고문과 감옥살이로 인하여 [[폐렴]], [[간경변|간경화]]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출소 후 [[서울대학교병원|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으며 막대한 치료 비용을 [[윤치호]]와 [[김성수(1891)|김성수]]가 지원해주었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59세[* 안창호는 그 해에 환갑이었으나 환갑을 맞지 못하였다.]의 일기에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는데 정확하게는 3월 10일 0시 5분 세상을 떠났다. [[위인전]]에서 자주 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아[* 한일합방의 원흉인 [[메이지 덴노]]의 본명 무쓰히토(睦仁). 사망 당시의 일본 [[천황]]이었던 유인(裕仁, [[히로히토]])이라고 말했다는 버전도 있다.],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위키백과]]에 따르면 저 말을 한 뒤에도 한동안 살아있었고 다른 말도 했고 유상규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기 전 미국에 있던 가족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현재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안창호 본인이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안창호의 동지들도 가족들의 귀국을 만류했다. 가족들을 일제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압박할지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는데 안창호의 두 아들들은 자신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괜찮다고 하였지만 동지들은 일제가 그런걸 지킬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가족들도 뜻을 꺾어야 했고 안창호는 끝끝내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마음이 아플 뿐이오. [[일본 제국|일본]]은 [[태평양 전쟁|자기가 일으킨 전쟁]]으로 [[일본의 항복|망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힘을 모으시오.''' >---- >[[1938년]] [[3월 10일]],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일제는 안창호의 사망이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했으며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말 것과 장례식 주관 및 참석자는 가족 친지 등 몇 명에 한하고 고별식에도 이들 이외는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반인의 조문이 금지되었고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되었으며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들의 언행을 사찰했다. 별세한 직후 [[망우리공원|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망우리로 향하는 출입로에는 '불온언동자'를 색출하고 소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영구차 앞뒤로는 경찰차가 경계를 폈으며 경관들은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하여 망우리로 향하는 길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경계를 폈다. 당시 영구차가 묘지로 갈 때 망우리 방향 통행은 일절 금지됐으며 망우리에 도착한 안창호의 [[관(장례)|관]]은 즉시 매장됐는데 묘지에 심으려고 가지고 갔던 [[무궁화]] 묘목은 압수됐다. 사후 30년이 넘은 1973년 [[서울특별시]]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과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