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타키아 (문단 편집) === [[고대 로마]] 시대 === [[파일:로마 안티오크.jpg|width=750]] 고대 안티오크 복원도 [[파일:안티오크 터키.jpg|width=750]] 얼마 남지 않은 고대 시기의 유적. 신전 기단부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인구가 무려 50만에 달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당대에는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의 뒤를 이은 3번째로 거대한 도시였고, 알렉산드리아와는 헬레니즘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시를 놓고 자웅을 겨눈 '(로마 세계 내의)동방 최고의 도시'였다. 그 전성기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와 자웅을 겨루며 '동방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고, 유라시아의 중간 가교 역할을 하며 값비싼 유리 세공품과 향신료 무역 등으로 거상도 오고 갔다. 도시 규모와 상징성, 경제력이 대단해진 만큼, 유흥 문화 역시 로마 서방과 수도 로마까지 유명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티오키아식 서커스였는데, 이 경기와 경기장 시설 규모는 로마인들에게 다른 로마 경마, 전차 경기와 다른 스타일로 그 명성이 대단했다. 이 외에도 여러 황제들은 이 도시에 [[빵과 서커스]]를 황제 이름으로 하사하기도 했고, 지진 등의 피해가 일어날 경우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들이 진상파악을 위한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그 위상이 엄청났다. 로마 공화정 후기와 제정 시대의 로마 권력자들, 특히 [[임페라토르]]들에게 있어 안티오크의 중요성은 대단했다. 로마 황제들은 안티오키아 내에 여러 공공건축물을 지어줬고, 안티오키아에 부임한 [[총독]]에게는 중근동 및 레반트,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일로 벌어지는 일의 [[사령관]] 역할이 부과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로마 제국 속주 총독 중 지중해 동쪽 관할을 총책임지는 속주 총독의 '꽃'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시리아 속주) 총독이 머무는 총독 관저, 사저가 위치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여러 기록을 보면, 동방에서의 주요 [[국방]], [[외교]] 문제에 안티오키아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언급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기록처럼 로마 황제들에게 있어 특정인사를 안티오크로 파견한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동방 문제를 맡긴다는 정치적 상징성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냥 [[대도시]]가 아닌 중동에 위치한 대도시였던지라, 결국 이곳이 [[기독교]]도들의 본거지가 되어 로마 제국 내 다른 곳들로 기독교를 퍼뜨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이 처음 기독교인(그리스도인, '예수 그리도스의 추종자'라는 뜻에서)라고 불린 곳이 안티오크였다고 한다.] 물론 [[예루살렘]]이 더 유명하긴 하지만, 예루살렘은 유대인 때문에 가장 반항이 잦은 속주인 유대 한가운데 위치한 관계로 그만큼 탄압도 심해서 대도시이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있고, 유대 속주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변방에 위치한 안티오키아 쪽은 탄압을 피해 온 기독교도들로 넘쳐나게 되었다고 한다. 총 인구들 중 1/5가 기독교도였다니 할말 다한 셈. 이후 기독교도들의 성지들 중 하나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대 기독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구 가운데 하나였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후의 로마 후기 시절부터 전해오는 원본을 13세기에 그대로 옮겼다고 하는 포이팅거 지도 (Tabula Peutingeriana)에는[* 주요 도시와 주요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다.] 안티오크가 로마,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3대 도시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50만 명에 달하던 인구를 자랑하던 이 도시는 거대한 지진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안티오크에는 여러 차례의 지진이 일어났으나 그중 가장 피해가 컸던 지진은 [[115년 안타키아 지진|서기 115년 일어난 대지진]]으로 당시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행군 도중 안티오크에 머물다 대지진을 경험했다. 이 원정에는 트라야누스의 양아들이자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도 참여하고 있었기에 최악의 경우 자연 재해로 로마 황제와 그 후계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뻔 했으나 다행히도 두 사람 모두 별 상처 없이 무사히 탈출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렇지 못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26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원래 있던 시민에 더해서 황제 행차를 수행하러 온 군대와 민간인까지 변을 당해서 피해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남유럽]] 전체 [[피레네 산맥]]-남[[프랑스]]-[[알프스 산맥]]-[[달마티아]]-[[발칸 반도]]-[[소아시아]]([[아나톨리아]])는 [[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의 경계로서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를 이루며, [[환태평양 화산대]] 다음으로 지진과 화산이 많다.] 전승이 아닌 실제로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지진이며, 현재의 건물과는 달리 석조를 쌓아 만들었던 로마 건물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당하고 말았다.[* 한 그리스인은 공회당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은 순서를 떠올려가며 훼손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를 응용해 기억술이라는 분야를 발전시켰다.] 그래서 현대에 고고학자들이 안티오크를 발굴하니까 발굴된 거의 모든 모자이크가 이 115년 대지진 이후에 만들어진 모자이크였다고 한다. 이후 많은 로마 황제들이 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도시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공중 토건 사업을 진행하는 등 노력했으나 이후 서서히 쇠락하고 만다.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수백 년에 걸쳐 천천히 쇠락했는데, 이유는 후술하는 항구 기능의 쇠퇴와 연관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