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타키아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 치하 === ||[[파일:안티오크 터키 1.png|width=340]]||[[파일:터키 안타키아 성벽.jpg|width=550]]||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운 성벽. 산성 부분은 일부 잔존한다 |||| [[사두정치]]와 동/서로마 분단 이후 안티오크는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로도 5대 총대주교좌 중 한 곳이자 제국 동방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으나 526년 또 [[526년 안타키아 지진|지진]]이 일어나 25만명~30만명이 사망하고 637년 [[라쉬둔 왕조]]의 공격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되었으며, 북시리아의 중심지는 이때부터 알레포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8세기 초반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의 대규모 공세가 좌절된 이후 동로마군의 공세 이전까지 전쟁 양상이 서로의 영토에 대한 일종의 유격전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슬람군의 습격과 동로마군의 반격으로 인해 양측의 국경지역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안티오키아 역시 국경지역에 있는 고로 이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안티오키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로 향하는 입구이자 시리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지이며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대도시였기 때문에 동로마는 이후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를 하였고 마침내 969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안티오키아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1085년 경 [[튀르크]] 세력에게 다시 안티오크를 빼앗겼고, 쉴 틈도 없이 1차 [[십자군 전쟁]]의 발발로 십자군에게 점령당했다. 게다가 십자군 지휘관 중 하나였던 타란토 공작 보에몽이 이곳을 개인적으로 차지하여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lity of Antioch)을 세웠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패배하여 명목상으로는 가신국이지만 실제로는 동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요안니스 2세를 이은 [[마누일 1세]]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이 시기의 동로마 영토를 표기할 때 안티오키아는 로마 땅으로 나온다. 이 때가 안티오크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안티오크의 성스러운 수류탄|이 시기에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무기로 성스러운 수류탄이 있다 카더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