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향 (문단 편집) == 생애 == 1243년(고종 30년) [[경상도]] 흥주(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흥주의 향족이었던 안부(安孚 / 1220 - ?)와 강주 우씨(剛州禹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유의 아버지 안부는 흥녕 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안자미(安子美)의 손자로 흥녕 안씨 일족은 흥주의 토착 향족 출신 [[가문]]이었다. 안부 또한 흥주의 [[향리]]로 있다가 [[개성시|개경]]으로 상경해 의업(醫業)으로 출세하여 이후 정3품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판도판서(判圖判書)에 이르러 치사([[관직]]에서 [[은퇴]]하는 것)하였으며 어머니 우씨는 예빈승(禮賓丞)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학문]]에 밝았던 안유는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18세의 나이에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이름을 향(珦)으로 고쳤다. 직후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겨 10년 가까이 재임했다.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의 난]] 때 강도(江都 : 지금의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원종 13년)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강도 탈출의 일로 [[원종(고려)|원종]]의 신임을 얻어 이름을 알리게 된다. 1275년(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는데 [[미신]]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며 재산을 축적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 등 [[상주시|상주]]에서는 [[무당]]들의 행패가 심했다. 이에 안향은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기 위해 무당들을 잡아다 엄히 다스렸으며 다시는 사특한 농간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상주의 [[풍속]]이 바로잡혔다. 이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左承旨)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2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고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11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하여 직접 [[원나라]]에 가서 주자의 저작들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1290년(충렬왕 16년) 고려로 돌아왔으며 1290년 3월 종2품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다. 문신이었지만 무재(武才)도 있었던 듯하다. 1294년(충렬왕 20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출진하기도 했으며 지공거(知貢擧)로 옮겼다가 12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使)로 보직되었다. 1295년(충렬왕 21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했으며 1296년(충렬왕 22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전직했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 원행을 다녀왔다. 1297년(충렬왕 23년)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으며 12월 집 뒤에 작은 서실을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충렬왕 24년/충선왕 원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장(璋)이 [[충선왕]]으로 즉위하면서 시행된 관제 [[개혁]]에 따라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 동경유수 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1298년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는데 그의 3번째 원나라 여정이었으며 생애 마지막 [[국외]] 활동이 된다. 1299년(충렬왕 복위 원년)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자 1300년(충렬왕 복위 1년)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이어서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최고 관위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충렬왕 복위 4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현재의 [[난징시|난징]](南京).)에 보내어 공자와 72현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의 저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충렬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때 무신인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관]]인데 어찌하여 [[문관]]을 양성하는 양현고에 [[재산]]을 내야 하는가하며 거부하자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만세의 규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무인인 내가 무엇하러 돈을 내어 문인 생도들을 가르치는데 보태느냐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가당한 일인가?"라는 말로 힐책하여 고세도 양현고에 재산을 내게 하였다. 1303년 12월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 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충렬왕 복위 5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고 박사(博士) 관직을 설치하여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오늘날의 장학재단 같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1304년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는데 도첨의중찬은 [[재상]]의 관직에 해당한다. 관직에서 물러난지 2년이 지난 1306년(충렬왕 복위 7년) 9월 12일에 64세를 일기로 개경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향이 세상을 떠나자 국자감과 사학 [[12공도]]의 생도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안향의 가는 길을 마중했다고 한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 뒤 충렬왕은 직접 장단(長湍 : 경기도 장단군)의 대덕산(大德山)에 장지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의 [[장례]]가 끝나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향은 이후의 사대부들에게 도학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성인으로 떠받들어졌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제사]]를 모실 정도로 [[학자]]들에게 숭앙받았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지 12년이 지난 1318년(충숙왕 5년)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원나라 화공을 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초상은 이후 안향의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조선 [[명종(조선)|명종]] 때 다시 복제하였는데 복제본이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회헌영정(晦軒影幀)이다.] 초상화가 그려진 다음 해인 1319년(충숙왕 6년) 문묘에 안향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문묘가 다시 지어진 뒤에도 안향의 신위는 제향신위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안향은 조선 [[문종(조선)|문종]] 이후로는 안유(安裕)라는 초명이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불리게 되는데 문종의 [[이름]]이 안향과 같은 '옥이름 향(珦)'이었으므로 [[피휘]]를 위해 초명으로 부른 데에서 기인한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의 생가가 있던 내죽리(內竹里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의 학사를 안향의 사당으로 옮겼는데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1549년(명종 4년)에는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퇴계 [[이황]](李滉)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명종의 친필로 쓰여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는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시작으로 300년 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철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소수서원은 지금도 유적지로 남아있으며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도 이 곳에서 봉안하고 있다. 지금은 그 인근인 순흥면 청구리에 안향, 주세붕, 주자 등의 인물들의 [[유적]]을 소개하는 소수[[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1643년(인조 21년) 안향의 묘소 근처인 봉잠산(鳳岑山) 기슭에 장단군의 유생들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워 안향을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전라남도]] [[곡성군]]에도 안향의 영정을 모신 회헌영당(晦軒影堂)이 세워졌다. [[1931년]] 안향의 후손 안순환은 [[중원대전]] 중 공묘가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 유림계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공자의 77대 종손 [[쿵더청]]을 만나 위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