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라위파 (문단 편집) == 역사 == 알라위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천년 넘게 동부 [[지중해]]의 소수종파였고,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쉬아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복잡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차별과 탄압, 빈곤에 수백년 넘게 시달리는 와중에 교리 상당수가 실전되었다. 알라위는 이미 13세기에 주류 이슬람에서 불신자나 다름없는 [[이단]] 취급 신세였다. 심지어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들이 일반적인 순니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포섭하여 [[투르코폴]]로 써먹었다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환영하고 맘루크 왕조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다. > 이 사람들의 이름은 ‘안누사이리야’로, [[카르마트]]파나 [[이스마일파|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다. 아니, 이들은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그분에게 깃들기를)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 (중략)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의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 (중략) 대신 이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 또한 그 말들을 마음대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다. (중략)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며,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자 한다. >---- > [[이븐 타이미야]] 당시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Ibn Taymīya, ابن تيمية)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지하드]])을 한다면 [[알라|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알라위의 초기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실전,변형되면서 오늘날의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는다.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의 알라위파 토벌 작전에서는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어차례 직접 참전하였으며, 그 결과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박해를 피해 순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쉬아 [[12이맘파]]로 개종했다. 이러한 연유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쓰인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편이다.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 편을 든 일을 징벌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박해했다.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비록 직접적 탄압은 없었지만, 소수에 불과한데다 이단취급받고 힘도 없었던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비슷하게 이단취급받던 [[드루즈]]는 적어도 레바논 일대에서 대대로 제후를 대대로 배출해서 지배계층이었던것을 비교해볼때 처지가 열악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데다, 대부분 경제력이 없는 농노들이었고, 수니파 지주들에게 대놓고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져서,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오스만 제국군에 강제징집되어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차별을 받았다. 나아가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총알받이]]로 쓰려는 목적으로, 무장도 빈약하게 시키고 죽어가게끔 최전방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교육수준도 열악해서,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자기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정도. 1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멸망한 오스만 제국 대신 [[프랑스]]가 시리아에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달리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1941년까지)으로 보호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이를 이용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이어 프랑스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프랑스 [[군대]]에 출세를 위하여 대규모로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붙어먹는다며 이를 박박 갈았으나, 위의 역사를 쭉 읽어내려왔다면 알겠지만 '''알라위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수니파가 훨씬 더 미운 존재'''였다.[* 예외적인 사례로 [[아민 알후세이니]]의 경우 아랍 민족주의의 대의 차원에서 알라위파들을 무슬림으로 인정하는 파트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도 서구화되기 시작했다.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온 군사적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또 군대를 통해서 알라위는 프랑스 통치 이후로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에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군대조직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 프랑스 통치시기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 1925-1927 재직)은 당시의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가 '''“알라위파는 과거 3-400년 동안보다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우리를 그대로 놔둬달라”'''란 말을 했다고 남길 정도다. 한편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 의석이 있었으나, 그 이후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슬람교도-기독교도로만 인구조사 카테고리를 나누면서 사라졌다. 아울러 1970년,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잡은 이래 알라위파는 '''드디어 시리아의 기득권층'''이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꿈도 못꾸던 대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현재까지 권좌가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알라위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며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세력의 테러, 반란시도에 시달렸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지역감정(원리주의 성향의 알레포-이들리브VS세속적인 다마스쿠스, 알라위파 중심의 라타키아 등)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모토로 계속 반란과 요인 알라위파, 친 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테러]]를 시도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런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같은 강경책으로 대처하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었고,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로 기독교, 순니파, 쉬아파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한편으로는 [[수니파]]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수니파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하고, 정부요인 할당에 친정부 성향의 수니파를 대거 기용하며, 순니파와 통혼하고 순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의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또 [[기독교]]와 [[드루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힘을 합치자며 손을 내밀어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는데 한편 이집트에서는 [[콥트교]] 신도를 일부러 병역에서 배제시켜 따돌림을 조장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우민화 정책으로 안정적인 독재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 내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현재의 [[시리아 내전]]의 양상이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정부군의 편에 서서 죽기살기로 반군과 맞서 싸우고, 끝내는 정부군이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 역시 이러한 특수한 알라위파의 환경에서 기인한다. 지금은 수백 년 알라위 역사에서 처음이자, __내전에서 패배한다면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__ [[리즈 시절]]이고, 이번에 권좌에서 축출되면 수니파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인해 아사드 정권만이 아니라 수백만 알라위파들의 역사 자체가 끝장을 맞게 된다. [[http://sonnet.egloos.com/4647382|#]] --2011년에 시위할 때만 해도 시리아에 이런 지옥문이 열릴 줄 몰랐겠지-- '''[[시리아 내전]]이 그토록 처절하고 잔혹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middleeast/syria/11518232/In-Syrias-war-Alawites-pay-heavy-price-for-loyalty-to-Bashar-al-Assad.html|2015년 4월에 이미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명 중 ⅓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또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고 드는 IS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그리고 이 극단주의자들의 날뛰는 만행들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하는 무능한 자유 시리아 군은 알라위파 입장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알라위파의 기준으로는 내전과 아사드 정권의 위기는 그들 시각에서 보면 사실상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외계인의 침공'' 급으로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알라위가 옹호하는 아사드 정권의 독재와 알라위파들이 적대세력에 행한 전쟁범죄는 비판해야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