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자스-로렌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보불전쟁 때 독일이 그랬듯 알자스-로렌을 합병했다.[* 독일로 넘어간 모젤 주와 뫼르트 주 일부 지역이 반환되었음에도 프랑스는 [[뫼르트에모젤]] 주를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다. 대신 프랑스는 그 지역을 통합하여 새로운 모젤 주를 신설하였다. 독일로 넘어갔던 옛 [[보주(프랑스)|보주]] 주 일부 지역은 바랭 주에 통합시켰고 [[테리투아르드벨포르]] 주는 원래 소속이던 오랭 주에 합병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결과적으로 반환 전의 주를 그대로 유지하고 반환된 지역에 새로운 주를 설치한 셈이 되어,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유효했던 프랑스-독일 간 국경이 이들 주의 경계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합병은 주민투표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강제합병이었다. 알자스 로렌 주민들은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사람과 그 자손에 대해서는 잔류 및 프랑스 국적 취득이 허용되었고, 1870년 이후에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 111,915명은 독일인으로 간주되어 1921년 7월까지 추방되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을 수복한 후 이곳 주민들을 A, B, C, D그룹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870년 이전에 프랑스 국적자였던 사람은 A그룹, A그룹에 해당하는 사람의 자손은 B그룹, 협상국이나 중립국 국적의 외국인은 C그룹, 1870년 이후에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과 그 자손은 D그룹으로 분류되었고, A그룹과 B그룹은 잔류 및 프랑스 국적 회복/취득을 허용하였으며 D그룹은 추방하였다.]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반(反)하여 주민선거 없이 일방적으로 알자스-로렌을 강제 병합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대다수의 주민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던 알자스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다(프랑스화가 진행된 로렌과 달리, 알자스는 언어부터가 독일어가 강세였다. 알자스 독일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알자스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성급한 동화정책, 특히 [[반교권주의|지역의 전통적인 교회학교를 국립학교로 대체시키려는]] 계획과 [[독일어]] 신문을 폐간하려는 시도는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알자스-로렌은 1920년대에 자치 운동을 전개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일에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이 책정되었고, 그 결과 독일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유사 이래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파탄 수준으로 붕괴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당시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적극적인 독일 재합병론을 펼치는 대신 일단 프랑스로부터 자치권을 주장하는 선에서 그쳤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역시 민족보다는 빵이 중요하지-- 그러나 당시 [[라인란트]]를 노리고 있었고[* 물론 이는 독일의 엄청난 반발,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알자스-로렌의 자치 요구가 결국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재병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요구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알자스-로렌의 자치권 획득 운동은 실패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주하자, 나치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북프랑스를 점령하였다. 전황이 좋은 초기에는 전후 유럽을 이끌 파트너로 비시 프랑스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영토적인 합병은 하지 않았다가 1943년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알자스-로렌의 젊은이들의 충성심이 약하다는 이유로 징집은 실시하지 않고 자원 입대만 받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자 나중에는 징집을 실시했다. 알자스-로렌에서는 징집이 아니라 자진해서 독일군에 입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로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자진입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프랑스 제3공화국|이전 정부]]의 억압적인 강제동화 정책이 알자스-로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을 거울삼아 강제동화 정책의 철폐를 선언하였고 이는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 데 일조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4공화국]]은 세속국가였지만 알자스-로렌은 그 원칙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에선 독일군 부대에 자원 입대한 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자스-로렌 출신이 적지 않았다. [[기 사예르]]의 경험에 따르면 부모 중 한 쪽이라도 독일계인 사람은 처형을 당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알자스의 주도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축구 감독인 [[아르센 벵거]]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 여느 스트라스부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알자스 독일어를 말하며 자랐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독일에 대한 증오를 가르쳤지만 자라서 독일에 가보니 자신의 동네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