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자스-로렌 (문단 편집) === 종합 === 외부에서는 알자스-로렌이라는 같은 지역으로 묶어서 보고 있지만 두 지역은 차이가 있다. 로렌의 경우 일찍이 프랑스어권이었으머 때문에 17세기 이후 로렌은 대체로 독일보다 프랑스에 대한 동질감이 더 강한 편이었다. 반면 알자스의 경우 더 동쪽에 있고 라인강에 접해 있다보니 독일어권에 대한 귀속 및 소속감의 정도가 로렌보다도 더욱 높았다. 그 결과 알자스 주민들의 대다수는 20세기 중후반까지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지금도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의 상당수는 독일어에 매우 능통하다. 로렌 지방 안에서도 메스, 베르됭 등 프랑스 본토에 가깝고 16세기에 프랑스에 병합된 지역은 매우 프랑스화의 정도가 높지만 룩셈부르크나 [[자를란트]]와 인접한 변경의 로렌 지역에서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 많은 경우도 있었다. 또 알자스에서도 남부 지역은 북부에 비해 비교적 프랑스화가 더 진전되었다. [[로렌]]의 경우 역사적으로 친프랑스적인 경우가 발견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발루아 왕조]]의 분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프랑스의 울타리에서 독립해 나가려던 샤를 용담공의 기도를 로렌의 귀족들이 전쟁을 통하여 좌절시킨 것과(샤를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기즈 공작 가문으로 기즈 가문은 애초에 로렌 가문 소속이다. 로렌에 본거지를 둔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에서 프랑스 가톨릭 진영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유명한 [[잔 다르크]] 또한 로렌 출신으로[* 본 문서가 지칭하는 알자스-로렌에 포함되는 지역이 출신지는 아니다. 잔 다르크가 출생한 지역 동레미는 로렌 레지옹에서 독일이 합병한 [[모젤]] 데파르트망이 아닌 [[보주(프랑스)|보주]] 데파르트망에 속했으며 독일에 합병된 적이 없다.], 그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십자 문양은 '로렌의 십자'로 알려져 [[자유 프랑스]]가 상징으로 쓰고 다녔다. 다만 중세 유럽은 귀족들과 백성들의 민족 의식이 동질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근본적으로 알자스-로렌이란 행정구역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별개로 이어져 오던 두개의 지역을 후대에 재결합하여 탄생된 것이다. 알자스와 모젤[* 이 점에서는 독일에 합병된 모젤 지역 외의 [[로렌]](로트링겐) 지역도 해당한다.]은 둘 다 동프랑크 제국와 [[독일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왔지만, 서로 별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의 경우 거의 독일어 방언을 유지하고 있었고 훨신 나중인 17세기에 프랑스의 일부가 된 반면, 로렌 지방은 물론 독일이 합병한 로렌의 모젤 지역의 상당수도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알자스-로렌이 독일 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모젤 지역의 프랑스인들은 독일 국경 내에 묶이게 되었고 탄압으로 독일통치에 대한 반감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은 수백년간 프랑스의 영향과 지배를 받으면서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이미 프랑스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고, 프랑스의 고유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영토의 일부였다. 이를 간파한 비스마르크는 [[보불전쟁]] 후 알자스-로렌의 병합으로 프랑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영구적인 적대국으로 만들 수 있다며 반대했고, 또 프랑스 정부도 알자스-로렌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할양을 제안하며 어떻게든 병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몰트케와 군부의 반발로 끝내 독일로 병합되었다. 빌헬름 1세나 비스마르크는 애초에 명분은 방어 전쟁이었는데[* 독일 통일을 반대하던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예상보다 너무 쉽게 무너져서 독일군과 독일내 여론이 이런 대가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게 되었다.] 영토합병을 하면 침략전쟁으로 변질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된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려했고 빌헬름 1세는 당시 영국대사에게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그저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서 거리를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을 정도 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1차대전까지 프랑스가 알자스-로렌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알자스-로렌이라는 분쟁지역이 없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요소가 현격히 줄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역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즉 이 작은 지역은 19세기와 20세 초반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쟁점지로 꼽혔다. 현재 알자스-로렌에 대한 인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프랑스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고 유럽 내에서 독일도 프랑스도 아닌 고유의 문화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독일-프랑스 공동교과서] 이렇듯이 역사란 보는 관점과 후대의 평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