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자스-로렌 (문단 편집) ===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 서기 899년 나이어린 [[루트비히 4세|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동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때마침 [[마자르족]]의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동프랑크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지역 방어를 위해 독일 [[5대 부족 공국]][*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슈바벤]] 공국, [[프랑켄]] 공국, 그리고 로트링겐 공국]의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서기 900년 로트링겐 공작이 신설되면서 로타링기아는 사실상 왕국에서 공국으로 격하[*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로트링겐 공작과 별도로 로타링기아 국왕 직책도 925년까지는 존재했다.]되면서 독일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4세|루트비히 4세 유아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독일계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독일 [[5대 부족 공국|5대 공작]]들이 모여 [[콘라트 1세]]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제도의 직접적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타링기아(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직 카롤링거 왕조가 다스리던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에게 충성하기 결의했다. 918년 유약했던 [[콘라트 1세]]가 사망하고 독일 제후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왕을 선출하기 위한 공작들의 회의에서 하인리히 1세는 작센 공작(하인리히 1세 본인)과 프랑켄 공작의 지지를 받았지만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의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바이에른 공작과 슈바벤 공작을 무력과 유인책을 함께 사용하여 굴복시킨 후 919년 마침내 [[독일왕|독일의 왕]]을 칭했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이 끝나고 [[독일 왕국]]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하인리히 1세는 서프랑크 국왕 편에 붙은 로타링기아를 다시 되찾기 위해 나섰다. 결국 922년 로타링기아는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독일 왕국]]에 재병합되었다. 로타링기아를 재병합한 하인리히 1세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로타링기아 왕국을 925년 공식 소멸시켰다. 이전까지 중프랑크 왕국의 후계자 자격으로 왕의 지위를 칭할 수 있었던 로트링겐의 군주는 이로써 왕이라는 타이틀을 잃고 로트링겐 공작으로 격하되었다. 또 하인리히 1세는 로타링기아 왕국 폐지와 함께 로타링기아 지역의 가장 동쪽 지역(알자스)을 떼내어 [[슈바벤]] 공국에 병합시켰다. 이로써 '''로렌(로트링겐)과 알자스가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다시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의 역사는 따로 흘러가게 된다. 959년 로트링겐 공국이 남쪽의 상(上)로트링겐 공국(현 로렌 지역)과 북쪽의 하(下)로트링겐 공국([[베네룩스]] 저지대)으로 분리되었다. [[오토 1세]]의 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가 통치하고 있다가 브루노 사후 분리되었다. 초대 상로트링겐 공작 프레데릭은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위그 카페]]의 누나인 베아트리체의 남편이며, 베아트리체의 모친인 헤드비게는 하인리히 1세의 딸로서 오토 1세와 브루노의 누나이므로, 오토 1세 및 브루노의 조카 사위였다. 이로써 로렌과 [[베네룩스 3국]]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베네룩스 지역인 하로트링겐 공국은 이후 1183년 브라반트 공국이 하로트링겐 공국에서 갈려져 나왔고, 1190년 브라반트 공작[* 현재의 [[벨기에 ]]지역으로, 벨기에 왕세자는 브라반트 공작이라고 불린다.]이 나머지 하로트링겐 영토도 모두 다스리게 되면서 하로트링겐은 브라반트 공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하로트링겐이 소멸하면서 자연스레 상로트링겐 공국이 그냥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로렌으로 이어진다. 중세 후반기에서 근세의 시점에서 로트링기아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다시 왕국으로 승격할 뻔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되었다. 이것은 발루아 왕가의 방계 종친으로서 부르고뉴 공작[* 왕자령으로서 받았다.]이었던 [[선량공 필리프|필리프 3세]](선량공)과 샤를(용담공)의 노력으로, [[백년전쟁]] 후반기에 필리프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아라스]]에서 필리프의 영국지원을 중지시킨 대가로 샤를이 필리프에게 사실상의 독립을 허용한 일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와 부르고뉴 백작령[* 현재의 프랑스 영토인 프랑쉬-콩테 지역]을 정복하면서 로타링기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두 발루아 왕가 출신 부르고뉴 공작들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로렌과 알자스로, 샤를은 로렌의 정복에 대한 명분축적과 프랑스-정확히는 [[루이 11세]]의 간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에게 "로타링기아(부르고뉴)의 왕"이라는 칭호와 대관을 받으려고 시도하였고,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로타링기아 왕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태가 되는 것이었지만, 황제가 대관식에 나오지 않아서 자동적으로 파기되었다. 그리고 점령하려던 로트링겐에서 격렬한 저항에 봉착한 샤를이 후사 없이 전사하면서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다. 세력을 키우던 부르고뉴와 샤를을 아니꼽게 보던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살리카 법]]에 따라 남자 계승자가 없으니 발루아 왕실 본가의 당주이자 주군으로서 산하 제후국의 영지를 회수한다'는 명분으로 부르고뉴를 침공, 부르고뉴를 합병하면서[* 다만 프랑슈콩테와 피카르디를 제외한 저지대 일대는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의 개입으로 막시밀리안과 결혼한 샤를의 유일한 자식인 딸 [[마리 드 부르고뉴|마리]]에게 넘어가면서 프랑스가 합병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로트링겐을 합병하려던 부르고뉴가 사라지면서, 이후 로트링겐은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독립된 [[공국]]으로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