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자스-로렌 (문단 편집) === 프랑스의 점진적인 병합 === '''로트링겐(로렌) 3 주교령 획득''' (1552년) 그동안 쭉 독일계 국가들의 땅이었던 알자스와 로렌 땅에 프랑스가 처음 발을 디디게 된 것은 1552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종교 전쟁에 휩싸여 있던 와중인 1552년,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모리츠(작센)|모리츠]]가 이끄는 독일 신교파 제후들과 동맹([[슈말칼덴 전쟁|샹보르 조약]])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전쟁을 지원하는 대가로 로트링겐(로렌)에 존재하는 [[메스(프랑스)|메츠]], [[베르됭|비르텐]], [[툴(프랑스)|툴]] 3개의 주교령을 획득했다. 이 3 주교령(전체 로렌 지역의 약 25%)은 가장 먼저 프랑스에 병합되었던데다가, 이 당시는 [[발루아 왕조]] 말기라서, 뒤이은 [[부르봉 왕조]] 시대, 곧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고 국가 정체성이 강해진 [[절대왕정]] 및 [[앙시앵 레짐]] 기간을 오롯이 프랑스와 함께했기 때문에, 이미 [[프랑스 혁명]]이 그리 머지 않은 200여년 후에 병합된 나머지 로렌 지역(즉 [[로트링겐 공국]])에 비해 빠르게 프랑스화되었다. 이 3개 주교령 지역과 그 주변 로렌 지방은 1870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알자스-로렌을 재합병할 때 이미 완전히 프랑스 문화권으로 흡수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의 알자스-로렌의 병합을 반대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 3개 주교령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어권 서부 로렌 지역은 보불전쟁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에 합병되지 않고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알자스 중남부 획득''' (1648년) 1648년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알자스의 중부 이하(준트가우(Sundgau) 지방. 현 프랑스 오랭(Haut-Rhin) 주)를 병합했다.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북부 알자스는 계속 신성 로마 제국에 남았다. '''알자스 완전 병합''' (1697년) 1683년 오스만 제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제2차 빈 공방전]]이 일어났다. [[빈(오스트리아)|빈]] 방어에 성공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변 기독교 국가들을 포섭하여 [[신성 동맹]]을 맺고 패퇴하는 오스만을 뒤쫒으면서 [[대 튀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1683년~1698년)이 일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들이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신성 동맹의 [[뒷통수]]를 때리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 즉 알자스 지역을 침공하여 [[9년 전쟁]](1688~1697)을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손쉽게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했다(1697년). 로렌 동쪽의 알자스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프랑스의 영토는 로트링겐 공국을 완전히 둘러싸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 병합된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와 그 인근의 북알자스 지역은 알자스-로렌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트라스부르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근세 독일 출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알자스 지역은 [[라인강]]을 따라 상류의 스위스와 하류의 [[라인란트]]를 연결하면서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어 있어 독일 경제권에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슈바벤]][* 알자스는 슈바벤 공국의 일부였고 나중에 일부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로 합쳐진다.] 및 [[라인란트]] 지역과 연계성이 강했다. 때문에 알자스 지역은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독일계 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 스포츠계에서 [[아르센 벵거]], [[앙투안 그리즈만]] 등이 있다. 음악계에서는 [[에밀 발퇴펠]]. 샤를 뮌슈 등이 있다.]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을 가져간 데 이어 알자스 북쪽으로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는 [[라인란트]]까지 차지하려 했지만 다른 협상국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로트링겐 공국]] 병합''' (1766년) 프랑스는 30년 전쟁과 루이 14세 시절을 거치며 로트링겐(로렌)을 수차례 침공하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방어로 로트링겐은 위기를 극복했다. 17세기 이후 로트링겐 공작들은 프랑스의 위협 앞에 바람 앞에 등불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로트링겐 공작들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잘보이기 위해 로트링겐을 비우고 제국의 수도 빈에 오랜 기간 거처하기도 했다. 로트링겐 공작 카를 5세는 아예 오스트리아군의 직업 장군이 되어 대튀르크 전쟁, 9년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활약하며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로트링겐 가문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서녀와 혼맥을 맺기도 했다. 18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어 왕조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구 프랑크 왕국 계열의 국가들은 [[살리카법]]의 전통에 의해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발표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하여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순조롭게 물려받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누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전유럽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선택한 신랑은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프랑수아 에티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이었다. 로트링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랑스는, 로트링겐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트링겐 공작 슈테판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인 로트링겐 공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의 요구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것이었지만, [[카를 6세]]는 어떻게 해서든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안정적으로 물려주려고 했다. 결국 카를 6세와 루이 15세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로트링겐 공국은 1736년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루이 15세]]의 장인. 이 양반은 일생이 참 기구한데 [[대북방전쟁]]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탈탈 털어버린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휴전 조건으로 왕을 갈아치우라고 요구하면서 친 스웨덴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황이 북방동맹 쪽으로 기우면서 원래 왕이었던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왕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알자스에 머물던 중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사위로 맞았다. 프랑스라는 강력한 지원 세력을 얻은 그는 폴란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 폴란드로 돌아와 2번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이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주장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폴란드를 침공,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결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되었으며 2번째로 폴란드 왕위를 잃은 장인어른에게 사위가 "위로 겸 남은 여생을 보내시라"고 로트링겐 공국을 영지로 주었다.]에게 주어진 후 그의 사망 후 프랑스에 병합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스타니스와프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을 뿐 아들이 없었다.] 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사가 끊긴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 대공국]]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는 것을 프랑스가 용인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빼앗기게 된 프란츠 슈테판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결국 자신의 영지를 포기해야 했고,[*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자네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으면 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장인 카를 6세가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었다. 1766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하면서 로트링겐 공국은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병합된 지역은 프랑스화가 이루어졌다. 강제적인 프랑스화 정책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이 되어 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까지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의 동부 지역은 여전히 [[독일어]] 방언을 모어로 사용했으며, 독일 라인강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