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천 (문단 편집) == 보천(보질도)태자와 동일인물설 == 한편, [[삼국유사]] 제3권 탑상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新羅淨神太子寳叱徒與弟孝明太子到河西府世獻角干家一宿, 翌日踰大嶺各領一千人到省烏坪累日逰翫, 太和元年八月五日兄弟同隠入五䑓山. (…) 淨神太子弟副君在新羅争位誅滅. 國人遣将軍四人到五䑓山, 孝明太子前呼萬歳, 即是有五色雲自五䑓至新羅七日七夜浮光. 國人尋光到五䑓, 欲陪两太子還國. 寳叱徒太子涕泣不歸, 陪孝明太子歸國即位. 在位二十餘年. 神龍元年三月八日始開真如院 (…) >신라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더불어 하서부(河西府)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큰 고개를 넘어 각기 1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647) 8월 5일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중략) [이 무렵] 정신태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으며 왕위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사람을 보내 오대산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니, 이에 오색 구름이 있어 오대에서부터 신라에까지 7일 7야 동안 빛이 비치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질도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만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재위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 비로소 진여원을 세웠다. (후략) *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藏師之返新羅淨神大王太子寳川·孝明二昆弟(…)到河西府, [今溟州亦有河西郡是也. 一作河曲縣, 今蔚州非是也.]世献角干之家留一宿. 翌日過大嶺各領千徒到省烏坪遊覽累日, 忽一夕昆弟二人宻約方外之志, 不令人知逃隱入五䑓山. 古記云 “大和元年戊申八月初王隠山中”. (…) 淨神王之弟與王争位, 國人廢之, 遣將軍四人到山迎之. 先到孝明庵前呼萬歳, 時有五色雲七日垂覆. 國人尋雲而畢至排列鹵薄, 将邀两太子而歸. 寳川哭泣以辞, 乃奉孝明歸即位. 理國有年 記云, 在位二十餘年(…)乙巳三月初四日始攺創真如院, 大王親率百寮到山營排殿堂, 并塑泥像文殊大聖安于堂中. (…) >[[자장(신라)|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중략)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곳이다. 혹은 하곡현(河曲縣)이라고 쓰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世獻)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더니, 문득 하루 저녁은 형제 두 사람이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 무신(戊申) 8월 초에 왕이 산중에 숨었다.”고 하였다. (중략) 그 무렵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장군 네 사람을 산에 보내 두 왕자를 맞아오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그때 오색구름이 7일 동안이나 [그곳을] 드리워 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쫓아 모두 와서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두 태자를 맞이하여 가려고 하였다. 보천은 울면서 굳이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효명이]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 고기(古記)에 이르되, 재위 20여 년이라 하였다. (중략) 을사(乙巳) 3월 초 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니, 대왕이 친히 백료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堂)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후략) [[삼국유사]] 대산오만지신조에서는 정신대왕을 정명 [[신문왕]]의 잘못으로, 효명태자를 [[효소왕]]의 잘못으로 보았으나 문맥상 시점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자장(신라)|자장]], [[진덕여왕|태화]])과 맞지 않고 지나치게 음상사적으로 유추하여 그 신뢰도가 높지 않다. 심지어 옛 기록을 인용함에 있어서 자의적인 해석(태화 원년이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재위 20년은 사망 당시 나이인 26세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을 하여 사료의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이를 [[효소왕]] 때의 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애초에 동생을 [[부왕]], 즉 [[갈문왕]]으로 봉하는 것은 상대에만 있던 관습으로 중대부터는 이러한 관습이 사라진다. 추가적으로 [[신문왕]]과 [[효소왕]]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인데 그 글자를 본명과 임의로 섞었을 리가 없고, [[삼국사기]]에서 [[효소왕]]이 [[신문왕]]의 장남이라고 한 서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두 기록에서 당시의 정세를 추정할 수 있는 단락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 1. [[자장(신라)|자장]]이 귀환한 후 일어난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선덕여왕]] 시기인 643년이다. * 2.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 형제가 산에 숨었다. * 3. 정신태자의 동생인 [[부왕]]이 왕위 다툼에서 죽임을 당하여(보질도태자전기) 정신대왕이 동생과의 왕위 다툼으로 폐위당하여(오만지신조) 태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 '''4. 장군들이 처음에는 보천/보질도태자를 왕으로 세웠으나 보천/보질도태자가 거부하여 효명태자가 왕이 되었다.''' 이 중 4번의 행적은 알천과 완전한 판박이다. [[진덕여왕]] 사후 알천이 처음에 섭정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음과 같은 대응 관계를 보인다 * 정신대왕('''淨'''神大王) = [[진평왕]] 김백정(金白'''淨''')[* 동생들인 [[김백반]]과 [[김국반]]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단순한 “반 갈문왕”과 “국 진안 갈문왕”으로 쓰인 사례가 있다.]. 여기서는 그 딸인 [[선덕여왕]]을 뜻함. 더불어 정신대왕은 보천과 효명의 아버지가 아니라 외할아버지가 된다. * 보천(寶'''川''') = 알천(閼'''川''') * 효명(孝明) = [[태종 무열왕]] * 정신대왕의 아우 부군(副君) = [[진평왕]]의 동생 [[국반 갈문왕]](葛文王). 여기서는 그 딸인 [[진덕여왕]]을 뜻함. 보천태자=알천임을 암시하는 금석문은 또 있다. >'''융기대왕께서''' >'''수(壽)가 산하(山河)와 같이 길고,''' >'''위(位)가 [[알천]]과 같이 크길 바랍니다.''' >'''천명의 자손(千子)들은 구족(具足)하며,''' >'''칠보의 상서로움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隆基大王''' >'''壽共山河同久,''' >'''位與軋川等大.''' >'''千子具足,''' >'''七寶呈祥.''' >---- >성덕왕 재위 5년(706)에 바치는 기도문.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에서 발췌. 보천태자를 기리는 진여원이 설치된 연도(705)와 거의 인접해 있는데 이는 [[성덕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다. 보천태자와 [[알천]]은 모두 [[성덕왕]]의 즉위 정통성을 강조하는 대상으로서 공통점이 나타난다. 한편 반론으로 보천태자가 알천이 아닌 [[김교각]]이라는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김교각]]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