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 (문단 편집) == 생애 == 1844년에 [[영국]] [[윈저성]]에서 태어났다. 애칭은 애피(Affie). 어릴 때부터 [[해군]]에 관심이 많던 알프레드는 14살에 입학 시험을 보고 [[사관후보생]]으로 [[영국 왕립 해군]]에 들어갔다. 1862년에 [[그리스]]의 [[오톤|오토 왕]]이 퇴위한 후 그리스 국민들에 의해 국왕 후보에 올랐다. 그리스 국민들은 국익을 위해 강대국의 왕족이 왕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다른 서구 열강들은 이를 원치 않았고 빅토리아 여왕 또한 반대해 무산되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형 [[에드워드 7세|에드워드]]의 처남인 [[덴마크]]의 왕자 빌헬름이 선택되어 [[요르요스 1세]]로 즉위한다. 1863년 형 [[에드워드 7세]]와 형수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같이 참석한 조카 [[빌헬름 2세|프로이센의 빌헬름 왕태손]]이[* 첫째 누나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 당시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하이랜드 드레스를 입고 장난감 더크(스코틀랜드 전통 단검)을 가지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심적으로 안절부절 못하자 알프레드는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이에 야마가 돈 빌헬름이 장난감 더크로 외삼촌인 알프레드를 위협했고 이에 알프레드가 제압하려고 시도했을때 빌헬름이 알프레드의 다리를 무는 소동이 발생했다. 정작 빅토리아 여왕은 이 소동을 보지 못했다고. 1866년 5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날에 15000 파운드의 연금과 함께 [[에든버러 공작]] 지위와 [[얼스터]], [[켄트(잉글랜드)|켄트]]의 백작 지위를 받았다. 알프레드는 해군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를 직접 방문한 최초의 영국 왕족이었다. 그는 몇 차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환대를 받았다. 1869년에 [[시드니]]를 방문했을 때 한 [[아일랜드인]]이 알프레드의 암살을 시도했다. 알프레드는 총에 맞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반-아일랜드 감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알프레드는 원치 않았으나 암살을 시도한 인물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74년에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마리야는 자존심이 강했으며 황제의 딸인 자신이 영국에서 어울리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가인 영국 왕실에서는 도리어 마리야를 거만한 왕자비라고 생각했다.[* 이때문에 마리야는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손윗동서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왕비]]와도 사이가 매우 나빴다.] 알프레드도 영국의 왕자로서 잘생기고 활발했으나, 권력욕이 있고 지적인 마리야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부부 사이에서 1남 4녀의 자식들을 낳았다. 1893년 8월에 백부 에른스트 2세가 사망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외국의 통치령을 다스리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다만 영국의 왕족임을 의미하는 Prinz von Großbritannien und Irland 칭호와, 영국 작위인 에딘부르크 공작 작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외국인 출신 공작임에도 알프레드는 통치 기간 동안 공작령의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군주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lfred,_Hereditary_Prince_of_Saxe-Coburg_and_Gotha.jpg|width=100%]]}}} || || 외아들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세자 알프레드 || 알프레드의 후계자인 외아들 알프레드[* 애칭은 영 애피(Young Affie).]가 심각한 성병과 여자 관련 문제[* 아일랜드 귀족인 제 4대 린스터 공작 찰스 피츠제럴드의 손녀 메이블과 1898년에 비밀 결혼했다고 한다.]로 권총 자살하면서 공작위는 조카 [[카를 에두아르트|찰스 에드워드]]에게로 이어졌다.[* 알프레드에겐 외동아들 외에도 딸이 4명이나 있었지만, 독일의 엄격한 [[살리카법]]으로 인해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다음 순번은 알프레드의 첫째 남동생 코넛 공작 아서와 그의 외아들이었지만, 아서 왕자는 고국을 떠나 독일로 가기를 거부했다.(실질적인 이유는 빌헬름 2세 및 독일의 교육 시스템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로 인해 다음 순번인 둘째 남동생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레오폴드 왕자]](이미 1884년에 사망)의 유복자 찰스 에드워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으로 발탁된 것. 물론 알프레드의 형 [[에드워드 7세]]와 그의 아들도 있었지만, 장성한 에드워드 7세의 아들은 훗날 영국 왕위를 계승할 조지(훗날의 [[조지 5세]])밖에 없어서 공작위를 물려받진 못했다.][* 만약 찰스 에드워드도 건너뛴다고 가정하면 에른스트 1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 공자의 자손인 코하리 계통으로 넘어가서, 페르디난트 공자의 장남 [[페르난두 2세]]의 자손인 [[카를루스 1세]], 루이스 필리프, [[마누엘 2세]], 카를루스 1세의 동생인 아폰수 왕자, 그리고 그 다음은 페르난두 2세의 동생 아우구스트 공자의 자손으로 넘어가 코하리 계통의 수장인 필리프 공자와 그 아들, 필리프의 동생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와 그 자손, 불가리아 왕가 순으로 순서가 돌아간다.] 1900년 7월 30일,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기 약 6개월 전에 인후암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