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군 (문단 편집) ===== [[조선]] · [[대한제국]] ===== 재위 기간이 짧았거나(정종, 문종, 단종, [[예종(조선)|예종]], [[인종(조선)|인종]], [[경종(조선)|경종]] 등) 힘을 쓸 수 없던 임금(정종, 단종, 철종[* 권력 자체는 가지고 있었지만 왕위 계승과는 먼 농민으로 살던 과거 때문에 [[제왕학]]을 배우지 않아 권력을 쓰는 법을 몰랐다. 왕이 될 준비가 안 되었던 사람이 왕이 된 것이라 힘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말년에 그나마 왕으로서 준비가 되었을 때는 당시 실권자 세력이었던 [[신 안동 김씨]] 탓에 철종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순종 등)은 제외. * [[세조(조선)|세조]](1455 ~ 1468)★◎ :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로 들어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조를 잔혹한 숙청만 빼면 어떤 결점도 없는 [[성군]]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심지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조차 '어쩔 수 없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해서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세조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면으로 재평가를 받을 때도 계유정난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왕으로서는 [[명군]]이었다는 긍정적인 평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세조의 각종 취약점들이 재조명되면서 암군이라는 악평이 꽤 늘어났으며, 세조 따위를 명군이라고 평가하는 것부터가 조선시대의 진짜 명군들[* [[태조(조선)|태조]], [[태종(조선)|태종]], [[세종(조선)|세종]], [[문종(조선)|문종]], [[성종(조선)|성종]],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이들 중 숙종은 무려 단종을 복권시킨 군주이기도 하며, 아들 영조는 [[김종서(조선)|김종서]]를 복권시켰다.]에 대한 모욕이라는 평가도 은근 있다. 물론 세조는 군사정권 시절에 받은 명군이라는 평에 어울리게 긍정적인 업적도 꽤 남겼지만,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게 제대로 발목을 잡고 있다. [[세종(조선)|아버지]]와 [[문종(조선)|형]]이 기껏 만들어 놓은 국정 시스템을 뒤바꾸는 동시에 생각 없는 공신 우대 정책을 펼쳐서 [[한명회]]를 비롯한 [[권신]]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고, 재위 말기에 그나마 [[구성군]] 등 신공신을 등용해 구공신에 대한 견제책으로 삼았지만, 구공신 견제를 제대로 못한 실책이 컸다. 조선 중기의 국방력 약화 또한 세조의 군사적 실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 한창 미화될 때와 같은 찬양 수준의 호평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일단 긍정적인 업적들도 있다는 점에서 ◎표를 추가한다. 호불의 군주로서, 조선 선대 왕들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수많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준 점,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점,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여 일반 백성이 부패한 수령을 고소할 수 있게 한 점,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점들[* 이 4가지 업적 중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게 한 것과 경국대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업적들은 모두 손자 [[성종(조선)|성종]] 대에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린 감이 있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 시절 만들어진 법이고,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이 법이 부활한 것은 성종 시절로, 이에 애민정신이 상당했던 세종이 이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부민고소금지법이 사실상 성종 시절에 만들어진 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이 좋게 평가를 받고 있다. * [[연산군]](1494 ~ 1506)★△ :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조선)|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 조선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가 [[중종(조선)|아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중종(조선)|중종]](1506~1544)★◎ :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위해 [[조광조]], [[김안로]] 등의 공신들을 꼭대기에서 고꾸라뜨리는 권력 암투에만 골몰하였다. 조광조와 김안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고꾸라트리는 식의 권력 암투로 인해 중종 재위 내내 수많은 사화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중종은 폭군의 대명사인 이복형 연산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복성군]]까지 죽이기까지 했다.[*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중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으로는 몰랐겠지만, 연산군 대에 개발된 [[연은분리법]]을 폐지한 것은 일본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비효과가 되어서 돌아왔다. * [[선조(조선)|선조]](1567 ~ 1608)◆◎[*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http://m.segye.com/view/20140318004858|#]]]:조선왕 중 연산군이 제일가는 폭군이라면 대중적으로는 선조는 '''조선 제일의 암군이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인사를 포함해서 능력 자체는 조선의 역대 임금들 통틀어서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나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 인재풀로는 가히 조선의 올스타급 능력자들이 많이 모인 세종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 신하들이 능력이 있어도 뭔가 [[허조|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드세다던가]] [[조말생|뇌물]], [[황희(조선)|친인척 비리 은폐같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하며 [[최만리|기껏 세종 본인이 최선을 다해 만든 문자를 대놓고 반대하는]] 등, 온갖 사건사고를 시도때도없이 치고 말도 안 들어먹어서 임금 입장에서는 참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던 반면, 선조는 또 그렇지도 않아서 휘하 신하들이 전쟁통에 휘말려도 끝까지 국가와 임금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인재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말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도 수위로 꼽을만하다. 당장 선조의 최고의 인사 업적인 '''[[이순신]]'''만 해도 전쟁 중 선조의 끝없는 의심과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때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분골쇄신했다.]해서 대신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특진시키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임진왜란 이외에는 의외로 꽤 뛰어난 임금의 면모를 생각보다 많이 보였던 것. [[동의보감]] 편찬 명과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되는 대공수미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살피기도 했고, 붕당을 적절히 이용해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준수한 내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여진족]]이 강세해지자 노토부락을 정벌하는 등 임란 이외에는 외치에서도 평타 이상은 쳐 주고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포문을 연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이 컸으며, 결정적으로 임진왜란의 활동은 전형적인 암군 그 자체이자 의심병 말기 환자의 행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조현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피해망상이 더욱 심했다.] [[이순신|충무공]]을 내리고 [[원균]]을 앉히는 결단은 어떤 의미로 봐도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들이랑 이순신이 잘 나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견제를 놓은 찌질이이자 소인배였다. 참고로 광해군은 어차피 자기 아들이자 후사를 이을 인물이고[* 어차피 즉위할 왕자인데 왜 굳이 견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으로 신하들이 선조가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등용해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는 것은 제 살 까먹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짓이었다. 한 마디로 편협하고 옹졸한 인격을 가진 인물.[* 실록에 보면 선조는 [[류성룡]], [[신잡]], [[윤두수]] 등의 대신과 [[삼사(조선)|삼사]]의 대간들에게서 '필부'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신하가 왕에게 필부라 함은 유배나 참형을 면치 못할 발언이고 실제 선조를 제외한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필부라는 소리를 들은 왕은 없다. 근데 그런 발언을 그것도 자주 들었다는것은 임란때 선조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그리고 왕권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임란이 터지자 바로 파천을 궁리했던 점도 크게 까이는 부분이다.[* 세간의 평대로 선조의 파천이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을 당황시켜 시간을 끄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항전 한번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일단 도망가려는 자세는 군주로 실격이며, 무엇보다 언제고 요동으로 어가를 옮겨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입조하려 했던 점은 도저히 커버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차라리 선조를 적극적으로 실드칠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머리는 좋다 혹은 [[결과는 좋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이 짓거리를 세번한 인조보다는 나을 수 있다. ] 물론 위에 나온 내용처럼 초/중/후반부의 업적이 탁월한 임금이라서 전쟁 이전(목릉성세, 인재발탁)이나 이후(중립외교, 국가재건)에나 선견지명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정책과 국가 비전을 쏟아낸 점에선 임진왜란의 찌질한 모습만 없었다면 성군은 몰라도 통치 한정 명군은 될만한 의외의 인물이다. 공과가 양쪽 모두 엄청난 인물이지만, 연산군의 10년의 태평성대가 2년의 폭정을 덮을 수 없었듯이 기축옥사와 임란 7년의 추태 때문에 실제의 업적과는 별도로 '교육적으로 본받아선 안 될 암군',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의 병폐'라는 정도의 평이 어울린다.[* 선조는 전쟁 도중에도 지능 하나는 비상했으나 그게 스스로 국가를 파탄내며 이득을 취하는 행동이라서 찌질이로 욕을 먹는 것이고, 40여 년 통치하면서 지능적인 분야 한정으론 항상 우수한 능력을 보인 2개의 얼굴을 가진 임금이다. 하지만 교육적으로 워낙에 본보기가 되기 어려운 국가 지도자인지라, 그냥 [[무능]]한 바보라고 가르치는 케이스가 많았다.] 이외에 [[조현병|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는 평도 있다. * [[광해군]](1608 ~ 1623)★△: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여겨져 왔고, 근현대에 와서는 재평가의 기류도 많았으나, 결국엔 연산군 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이 다수다.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명군의 재목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고 결국은 폐출됐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익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내정에서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으며, 세자였을때와 달리 민간 사회의 복구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정책에 대체로 시행 반대를 해왔으며, 많은 신하들과 왕족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국가를 망가뜨렸다. 특히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고 [[이이첨|간신배]]들을 끼고 살며 그 똥물에 본인도 자멸했다. 그럼에도 최근 일각에선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 및 [[드라마]]가 성행, 전술한 [[선조(조선)|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었고,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암군임에는 분명하고 후대나 선대에 비해서 딱히 낫다고 보기 어렵다. * [[인조]](1623 ~ 1649)★[* 소현세자 문제에 한해]: 다방면으로 말아먹었지만 특히 외정 측면에서 실책([[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있다.[* 그렇지만 병자호란의 책임은 그의 외교 정책만이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 상황의 악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오수창 교수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곳에서 주장한다.] 정묘호란과 [[이괄의 난]]은 누가 봐도 자신의 실정으로 일어난 일이고, 병자호란 때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보내는 초대형 실책까지 저질렀다. 여기에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는 정묘호란으로 청나라가 숨통이 트여서 일어난 일이기에 결국 이것도 자신의 무능력으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하다. [[소현세자|큰아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으로 후계 구도와 [[효종(조선)|효종]]의 계승 명분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숙종(조선)|증손자]]까지 피해를 보게 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크다.[*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원손을 이용해 왕위를 은근히 견제했지만, 애초에 세자가 볼모로 끌려간 것 자체가 인조의 무능함이 원인이다.] 내치 측면에서는 광해군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말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하게 한 게 없다. 나라를 말아먹은 자와 아무것도 안 한 자의 차이다. 또한 나라를 수차례 전쟁통으로 끌어내렸고 뜻있는 신하들을 수없이 죽였으며, [[김자점|권신과]] [[심기원|측근들]]을 꾸준히 등용하며 부정부패까지 유발, 광해군 시절보다도 더 많은 민란에 시달렸다. 광해군 및 [[북인]]의 부패와 만용을 타파한다며 [[반정|인조반정]]을 일으켜놓고 사실상 똑같은 짓을 한 셈인데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연산군부터 인조까지 오랜 기간동안 암군 및 외세의 침입을 겪은 조선은 이 사람의 아들인 [[명군]] [[효종(조선)|효종]]대에 와서야 회복된다. * [[순조]](1800 ~ 1834): [[세도정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삼정의 문란]]을 방치한 왕으로 평가된다. 사실 순조는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국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였던 [[영조]]와 아버지 [[정조(조선)|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정국을 주도하였던 선조들의 능력을 본인이 잘 따라가지를 못했고, 결국 끊임없는 난세에 지쳐버려 정무에 손을 놓아버렸다. 물론 고조할아버지였던 [[숙종]] 이래로 직계 선조들이 양난 후의 조선을 한 개인의 위엄쩌는 카리스마로 움직이게 만들어 놓은 운영체제에서, 험난한 정치적 풍파와 여러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하여 초기부터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과 시절만 잘 만났더라면 암군 정도까지 평가받을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의 씨앗을 남긴 부왕 정조도 최근 들어서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순조는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조선 몰락의 시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23세에 요절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 [[고종(대한제국)|고종]](1863 ~ 1907)△◎[* 이외에 퇴위당한 후 시해당했다(▲)고도 하는 주장이 있다. 이는 민간에서가 아닌 학계에서 나온 주장이다.]: 우유부단한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거나 선대들의 실책을 떠안은 조국의 독립에 애를 쓴 비운의 군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일단 그 당시 [[청나라|청]],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의 주변 상황도 그렇고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이 [[철종(조선)|철종]] 이후 [[고종실록]], [[순종실록]] 등의 편찬 주체가 [[일본 제국|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나름 자주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와 시대적으로 너무 불리했다는 점도 있지만, [[명성황후|아내]]를 비롯한 민씨 일가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등등을 자주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벌하지 않아 방관하였고, 무엇보다도 [[명성황후]]의 조언 하나만 듣고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빼도 박도 못할 실책이다.[* 고종이 임오군란에 청군을 왜 끌어들였는지는 애매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인 결정은 [[교차검증]]까지 되는 사실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하면, 제물포 조약에 의거해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건덕지를 줬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에 의존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호응도 얻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도 전혀 줄이지 못한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에게 균형추가 쏠리면서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어가는 상황에서 [[헤이그 특사|최소한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려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나[* 국권 피탈을 막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독립운동가 수준의 활동에 그쳤고, 황제로서의 직위와 영향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고종이 더욱 영리하게 나섰다면 아내처럼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황제로서의 직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는 [[을사조약]]의 힘이 크다.], 사실상 일본으로 국권이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무위에 그쳤다. 그래도 나라가 망한 뒤에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아들 [[의친왕]]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