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브로시우스(교부) (문단 편집) === 동서 로마 내전의 사이에서 === 이후 그는 단순히 서방 교회의 유력한 주교 수준을 넘어서 로마 제국 전역 기독교 사회의 최고 유력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심지어 영향력 면에서는 [[교황]]보다도 더 강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의 규모 뿐만이 아니라[* 그의 연설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를 따르는 신자의 수는 많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따르는 인물은 많았다.] 엘리트 공직자 교육을 받으면서 키워 온, 어떻게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를 꿰뚫어 보는 그의 정치적 식견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 마디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의 영향력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던 것.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사죄를 받은 일이다. 390년, [[테살로니카]](테살로니키)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빠뜨려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나자, 분노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군대를 보내 약 7천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테살로니카 학살). [[파일:M808285.jpg]]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황제가 이를 묵살하고 부활절에 측근들과 함께 성당으로 행차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성당의 문 앞에 서서 황제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에 다시 성당에 찾아온 테오도시우스 1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성당 문 앞에 서서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황제는 이에 굴복하고 그 일에 대해 사죄하였으며,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 이후 성당 출입을 허가하였다. 이 보속의 내용이 뭐였던고 하니, 황제를 상징하는 장식물과 옷을 다 벗고 일반 평복을 입고 주교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는 [[다신교]] 시절의 로마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는 암브로시우스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실제로 십 몇 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사하게 교회가 황실의 권위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대로 황제에게 박살나서 추방당했다. 사실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암브로시우스처럼 공식적으로 황실의 행동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서 평소부터 권력자들이 눈엣가시로 여기던 게 터져나온 것에 가깝다. 그의 추방을 반대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하기아 소피아]]가 유실되기도 했다. 황제는 물론 이론적으로 평신도였지만 정치적 힘과 권위 측면에서는 황제가 더 강했으며, 심지어 암브로시우스는 이 당시 교황도 아닌 유력한 주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은 그가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받는 민중의 지지가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의 인맥, 그리고 그의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거두고 교회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위상은 황제의 사과를 받음으로써 한층 더 올라갔다. 이는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큰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적절히 활용할 능력이 있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였다. 그 혐의는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장군에게 돌아갔으나 어디까지나 정황 증거 수준이었고, 자살한 것으로 여겨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아르보가스트 반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르보가스트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아르보가스테스 반란 진압 후 가담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청원하기도 했는데, 아르보가스트가 다신교 우대 정책을 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잠시 동안이지만 세웠던 대립 황제 [[에우게니우스]]도 기독교인을 가장한 이교도였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