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행어사 (문단 편집) === 업무 ===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임명하며, 임명시 업무 지침서인 《사목》과 [[숭례문]]을 나갈 때 뜯어보도록 하는 《봉서》 1장을 나무상자나 보따리 같은 데에 함께 담아서 준다. 숭례문을 나서 《봉서》(封書)[* 《봉서》는 대개 [[한양]] 안에서 뜯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당시의 개념으로는 [[사대문안|4대문 안]]이 한성이었고, 그 밖 10리까지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한성부]] 관할의 한양으로 취급했으며, 그 밖을 [[경기도]]로 취급했다.]를 뜯어보면 "너는 이제부터 암행어사다. 어디 도의 어느 마을에 가서 수령과 관리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보고하라[* [[왕]]이 직접 특정 지역을 찍어서 살펴보라는 《봉서》를 내렸다는 건 이미 해당 지역의 첩보가 [[사헌부]] 등을 통해 입수되어 왕에게 보고가 올라갔다는 의미다. 암행어사가 '''출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거나 처벌받은 이유가 이미 첩보가 다 들어왔는데 직접 가서 봤다는 어사가 그걸 못 잡았느냐는, 일종의 직무 태만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임무가 적힌 문서가 있었다. 여기에 신분증 겸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 지방 수령이 도량형을 속여서 백성을 착취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시체를 검사할 때에도 쓰이는 [[자(도구)|자]]인 유척(鍮尺) 등을 함께 받았으며, 이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봉서》를 아무데서나 뜯었다가 적발되어도 파직되는데, '''암행'''이라는 철칙을 어겼다는 사유다. || [[파일:/image/020/2005/12/19/200512190124.jpg]] || || 영화 〈[[춘향뎐]]〉 스틸컷 || 암행어사의 상징하면 [[마패]](馬牌)인데, 마패는 길 중간 중간에 있는 [[역참|역]]에서 [[말(동물)|말]]을 빌려서 탈 수 있다는 증표이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에 따라서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달라진다. 1마리~10마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10마리는 왕 전용, [[영의정]]은 7마리까지, 암행어사는 보통 2마리~5마리 정도.]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에도 증표로 사용했다. 또한 병력으로 쓰인 역졸도 역의 관리인들인지라[* 이웃 고을의 정규군이나 포졸 따위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면 이 지역에 암행어사가 왔다고 광고한 셈이니 출도까지 정보가 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앙 정부 직속기관이라 지방 수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역참에서 역졸들을 동원하는 것.] 역과 밀접한 관계라 하겠다. 암행어사는 지방 관리가 부패해서 백성들이 도탄을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출도'(출두)를 통해 정체를 밝히고 관리를 왕명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보통 암행어사하면 흔히 생각하는 게 출도인데, 왠지 보통 출도할 때는 마패를 번쩍 들고 '''"암행어사 출도야!"''' or '''"암행어사 출도요!"''' 를 외치고 [[육모방망이]]를 장비한 역졸들이 관아로 몰려들어 관아 휘하의 관졸들과 이방, 사또 등을 포박하고 암행어사는 윗자리에 자리를 잡고 재판을 하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 > 오후에 일제히 길을 떠나 그대로 황혼에 [[순안구역|순안현]][* 지금의 [[평양시]] [[순안구역]]] 관아 문 앞에 도달했다. 본관 수령 이문용은 마침 산사로 놀러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관속들은 그를 마중하려고 모두 관문 밖에 모여 있었다. 역졸들이 빠른 소리로 암행어사 출도를 한번 외치니 사람들이 무리지어 놀라 피하는 것이 마치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지듯 했다.(중략) 암행어사의 위엄과 서슬은 과연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한참 있자 차차 모여들더니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펴며 책상에 촛불을 밝혀 점차 위엄과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5월 13일자.[* 순안 현감 이문용은 박내겸에게 결국 봉고 조치를 당하고, 조정에 봉고 조치가 보고되자마자 관례대로 파직당했다. 여담이지만 주인의 파직으로 끈떨어진 신세가 된 이문용의 하녀가 [[서낭당]]에 가서 "내 밥줄을 끊은 암행어사에게 천벌을 내려주세요" 하고 빌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박내겸이 듣고 씁쓸해하는 내용도 일기 뒤쪽에 나온다.] 물론 암행어사가 비리만 잡는 관직은 아니고, 애초에 완벽한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죄질에 따라서 관인을 빼앗고 봉고[* 관가의 창고 문을 닫고 수령을 직무정지시킴. 암행어사에게는 수령의 직무 정지 명령에 해당하는 봉고 권한만 있고, 파직 등의 처리는 어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임금이 할 일이다.]한 다음에, 임시로 지역의 형벌을 심리하고 백성들 민원도 좀 들었다. 임무가 완전히 끝나면 수령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별단으로 민정과 효자, 열녀 등에 대한 미담도 적어서 효자문이나 열녀문이 건립되는 계기도 되었다. 봉고당한 수령은 보통 관할 감영에 끌려가 수감 뒤 왕명을 기다린다. > (전략) "나는 [[해주시|해주]]에 사는 사람으로 묏자리 송사를 벌이다 자산에 귀양 갔는데, 다행히 용서는 받았지만 돌아갈 길의 양식을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함경도]]로 들어가 잘 아는 수령에게 구걸할 계획이며, 마침 붓과 먹을 얻었으므로 그것을 팔아서 여행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편으로는 믿어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심도 하였다. [[기생]]들 여럿이 앞에 앉아 있다가 [[쌍륙]]을 놀기에 내가 말을 놓아 주었다. 기생 하나가 살짝 웃으며 말하였다. "손님 손놀림이 꽤나 익숙하고 말씀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니, 결코 곤궁하여 구걸하러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후략) >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14일자. >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에 업무 조사가 끝났으므로 공개 행차를 하며 [[성천군|성천]]으로 향했다. 밤에 유선관에 들어가 묵었다. 본관 수령은 서희순(徐熹淳)이 새로 부임했다. [[기생]]들과 도장 관리를 맡은 자들이 서로들 가만가만 하는 말이 '''"어사또의 용모가 접때 구걸하러 관아에 들어왔던 길손과 흡사하다"'''라고 하여 웃음이 나왔다. 이날 50리를 갔다. >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6월 19일자. [[춘향전]]이나 [[박문수]] 설화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암행어사들은 신분을 감추고 정보가 많이 오가는 기생집이나 주막 등에서 물정을 알아보곤 했는데, 근본이 과거 급제자들이다보니 평민이나 천민으로 행세하면 너무 어색해서 들킬 위험이 컸으므로 적당히 몰락 양반 정도로 꾸미고 다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