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행어사 (문단 편집) === 제도의 몰락 === [youtube(LQoBlQBvY70)] 물론 암행어사 제도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며, 어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사망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고, 실록에 기록이 남아있기에 상세히 알 수 있는데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洪亮漢)이 [[태인면|태인현(泰仁縣)]][*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중독(中毒)된 것이라고 의심했다.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4번째 기사 1763년 [[청나라|청]] [[건륭제|건륭(乾隆)]] 28년 >---- >또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이 태인에 이르러서 죽었다고 하니, 규례대로 담군을 지급하고, 모든 일도 각별하게 거행하도록 각 해당 도신에게 일체로 엄히 신칙하고 분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1217책 (탈초본 68책) 영조 39년 4월 9일 병신 18/28 기사 1763년 [[청나라|청]] [[건륭제|건륭(乾隆)]] 28년 > [[평안도|평안]] 감사 김이교(金履喬)가 [[평안북도|청북]][* 청천강 이북지방을 뜻하는 말로 이북5도 기준 오늘날 평안북도를 가르킨다.] 암행어사 임준상(任俊常)이 [[강계시|강계부(江界府)]]에 이르러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죽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 “지금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놀라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평소 그 사람이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명하기를 기다려 발탁해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혹하고도 참혹하다. 소중하기로 말하면 이목(耳目)의 구실을 맡겼고, 공로로 말하면 사신이 들판과 늪 지대를 알리는 것보다 더했는데, 그 죽음 또한 국사 때문이었다. 별도로 돌보아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고 청북 어사 임준상을 특별히 동부승지로 증직하고 널을 싣고 돌아오는 것과 장사를 치르는 절차에 대하여 각도로 하여금 특별히 돌보아 주게 하라.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있으면, 나이가 성년(成年)이 되지 않았더라도 [[관례|복을 벗기를]] [[음서|기다려 채용하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했다. >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26일 무진 1번째 기사 1822년 [[청나라|청]] [[도광제|도광(道光)]] 2년 당시 임준상이 사망한 때는 역병(콜레라)이 유행하던 시기(1821~1822)와 겹친다. >[[경상도|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가, ‘우도 어사(右道御史) 조병로(趙秉老)가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지금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평소에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복명한 뒤에 크게 등용하려고 했는데, 이런 소식이 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다. 귀와 눈 같은 중요한 직책에서 3년 동안 애써 수고했으며 국가에 봉직하다가 죽었으니, 조정(朝廷)에서 우휼지전(優恤之典)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고 영남우도 암행어사(故嶺南右道暗行御史) 조병로에게 특별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는 동시에, 원래의 치부(致賻) 외에 후하게 더 지급하라. 반구(返柩)와 귀장(歸葬) 등의 절차는 특별히 해도에 신칙하여 규례를 벗어나서 각별히 비호하며, 그의 아들은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상을 마친 뒤에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했다. >《[[고종실록]]》 23권, [[고종황제|고종]] 23년 5월 17일 기유 1번째 기사 1886년 조선 개국(開國) 495년 정작 실록에 등장하는 임무 중 사망한 암행어사 기록은 이게 전부다. 각각 내용은 * 《[[영조실록]]》 -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 의문사. 독살로 추정된다는 내용. * 《[[순조실록]]》 - 청북(평안북도) 암행어사 임준상이 설사와 구토로 사망했다는 것을 전해 듣자,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명하는 내용. * 《[[고종실록]]》 - 경상우도 암행어사 조병로의 사망을 전해 듣고,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명하는 내용. 이다. 이 내용은 약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암행어사 제도사에서 극히 일부분이었고, 또 희귀한 사례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초에 실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지방 수령이 어사의 비보를 듣고 공연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즉각적으로 조정에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암행어사도 왕이 직접 골라 임명한 만큼 암행어사를 해코지는 고사하고 방해라도 하면 처벌받는데다 방해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처벌은 파직은 기본인데 진짜 죽을 정도로 해코지를 하면 사형을 면치 못한다,] 만약 세간에 떠도는 낭설대로 정말 암행어사의 생존률이 30% 미만이었다면 무려 3번씩이나 암행어사를 역임한 [[성이성]][* 앞서 서술했지만, 이분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다.]은 최대 2.7%의 극악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전투종족]]이라는 말이 된다. 오히려 암행어사들은 무사히 임무를 완료하고 난 후에, 정치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는 자신들이 암행어사 시절 파면한 관리들의 미움을 사[* 각기 서용보와 김우명이다.] 훗날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고종조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이건창]][* [[병인양요]] 당시 순절한 이시원의 손자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도들은 나라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진압하되, 무고한 백성들까지 해를 입히는 [[탐관오리]]들은 더욱 엄중히 벌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서재필]]이 국내 입국했던 시절에 그의 무례함과 위선을 비판한 적이 있다.]은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하고 여러 활동을 했는데, 애먼 선비를 장살했다는 이유로 결국 [[평안도]]의 [[벽동군|벽동]]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추사나 다산처럼 벼슬길 포기하는 루트를 타지는 않았지만서도.[* 애시당초 이건창의 집안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유공자]] 급이었다.] 어쨌거나 암행어사와 수령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면 어사가 깨갱이 된 경우도 많았다. 다만 저런 근거없는 낭설이나, 사망 사례들, 정치 보복 사례 등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일단 암행어사가 엄청나게 고생스러운 보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가령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 되는데, 너무 자주 쓴다, 너무 안 쓴다, 너무 [[악필]]이다, 문맥에 안 맞는다 등등 갖은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으며,[* 사실 이건 암행어사뿐 아니라 모든 [[조선]] 관료들이 겪은 고충이다. 정조 시기에는 보고서를 일곱번이나 써서 올렸는데도 형식에 맞지 않으며 내용도 정돈이 안 된 채 뒤죽박죽이라 파직당하고 보고서가 개판이니 활동도 개판으로 했다고 오인받은 암행어사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보고서만 엉망이고 활동은 성실히 했다는 점이 드러나 다시 복직했다. ~~공직이나 공직 하청에서 일하면 양식 안지킨다고 사수한테 까이는 사람은 바로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활동비는 심각하게 낮아서 사실상 그 돈으로는 활동이 불가능한데, 다른 사람에게 식량 등을 조달하는 것을 전부 [[뇌물]]로 봤기 때문에, 그 상황을 견디다못해 부패한 지방관리와 오히려 결탁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좀 심한 경우는 인근 고을에 암행어사가 나타나면 주변 고을 수령이 미리 알아채고 [[성문(건축)|성문]]을 닫고 [[농성]]하거나[* 중종 20년 1월 황해도 어사로 간 조종경이 실제로 강령현(現 강령군)에서 겪은 일이다. 이에 조종경은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폐단을 발견해내 중종에게 보고했고 당연히 중종은 바로 강령현의 수령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반대로 아예 [[관아]]를 비워버리거나, 군사를 풀어 어사를 잡아다가 협박하는 경우나 [[어사출두]]할 때 튀어나오는 병사들은 평소에는 역(驛)에서 일하는 [[역졸]]이나 다른 관청의 병사들인데, 여기서 [[병력]]을 [[차출]]하면 인근 고을 [[수령]]들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응할 시간을 주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춘향전]]》의 예를 들자면, [[변학도]]가 사또로 있는 지방의 인근 지역인 [[익산]] 현감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로 대응할 시간을 엄청 벌어놓은 셈이다. >(전략) 어떤 고개에 도달하여 말과 마부, 수행원을 먼저 보내고 나무 아래에서 홀로 쉬노라니, 추적하는 자가 다가왔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먼저 엉뚱한 일을 말하면서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얼굴색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또 가짜 어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남몰래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한 내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더니 민간에서 [[오라#s-1.1|붉은 실(紅絲)]]이라고들 부르는 쇠줄을 허리춤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당시에 붉은 쇠줄은 관아에 소속된 정식 [[포졸]]만이 사용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공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즉 [[수갑]]을 내밀며 "나 경찰이오"라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 >이 지경에 이르러 재앙의 징조가 곧 머리에 닥치는 터라, 나도 대답없이 가슴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 순간 그 사람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면서 쳐다보더니 곧 자빠졌는데, 언덕을 따라 판자 위의 구슬처럼 몸이 굴러가다가 평평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나는 마패를 들어 다시 가슴 속에 넣은 후 밑으로 내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했다.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이어서 먼저 자리를 떠서 고개를 넘어갔다.(후략) >박내겸, 《[[서수일기]]》, [[순조]] 22년 음력 4월 22일자. 위 기록처럼 진짜 암행어사가 잠복한 [[포졸]]에게 가짜 암행어사로 오해받아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고, 심지어 전라우도 [[무안군|무안]] 현감으로 부임한 성수묵이라는 관리는 [[주막]]에서 괴한들에게 살해당할 뻔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2년 전 성수묵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왔을 시절 곤장을 쳐서 죽인 부패한 아전들의 자식들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주모자는 효수되고 나머지 2명은 감형받아 [[노비]]가 되었다. 성수묵 또한 당시의 책임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무안 현감에서 파직되었다. 《[[순조실록]]》 권32 31년 4월 5일 정해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104005_002|관련 내용]].] 게다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낮선 사람이 나타나 고을의 사정이나 수령의 행적 등을 물으면 대번에 가짜 어사인지 진짜 어사인지 관심거리가 되곤 했다. 심지어 '''엄한 [[심마니]]가 가짜 어사로 오인받는 소동도 일어났다'''. 가짜 어사는 '''왕명을 위조한 것'''이니,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심신장애]]를 인정받을 수 있는 희귀한 경우[* 예를 들면 동네 [[지적장애인]], 아니면 [[허깨비]]를 보는 명백한 [[조현병]] 환자 정도다.]가 아닌 이상 당연히 [[사형]]당했다. 이렇게 보기와는 달리 애달픈 직책이다 보니, 암행어사에 임명되자 "제가 전하에게 뭐 잘못한게 있길래 저한테 이러십니까?"라고 끄적거려 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 뒤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황제|고종]] 33년(1896년)에 나이 74세의 정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99년 윤현섭을 [[충청남도]] 어사에 임명했다는 봉서가 존재한다. 봉서가 진품이라면 실질적으로는 윤현섭이 마지막 어사인 셈이다. 이 시기는 [[고종(대한제국)|고종]]조차도 어사에 대해서 한탄했을 정도로, 어사 제도가 심하게 [[타락]]했던 시기였다. 겉으로는 진짜 선량한 암행어사인 척 하면서 실상은 관가랑 한통속인 질 나쁜 [[쓰레기]]들도 몇년 전부터 꽤 있었으며, 한 번은 단속을 하러 갔는데 오히려 [[접대]]를 받고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해서 똑같이 물든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점차 강명함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수백년동안 조선의 버팀목이 되어 준 어사 제도도 결국 그 기능을 다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