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앵발리드 (문단 편집) == 상세 == 앵발리드는 한 개의 건축물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대에 세워진 여러 건축물의 집합체다. 처음에 지어진 앵발리드 [[호텔]][* 프랑스어의 호텔(hôtel)에는 간병 시설이란 뜻이 있으며 호텔(hotel)과 [[병원]](hospital)의 어원은 같다. 또 '앵발리드'(Invalides)는 말 그대로 [[장애인]]/부상자를 뜻하는 단어로, 상당히 사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영어에서 invalid가 명사로 쓰일 때와 용법이 거의 같다.]은 [[루이 14세]] 시대인 1671년에 착공하여 1706년에 완공된 부상병 간호 시설이었다. 1670년 11월에 [[루이 14세]]가 노병들과 불우한 퇴역군인들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시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군은 궁정 건축가 리베랄 브뤼앙(Libéral Bruant)이 설계를 맡았다. 군인들을 위한 생 루이 교회도 계획되었는데 브뤼앙이 노쇠하자 루이 14세는 1676년에 궁정 건축가인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에게 작업을 이어받게 했고 1679년에 완공되었다. 망사르는 1679년부터 황금 장식의 [[돔]]이 달린 앵발리드의 궁정 교회도 설계하였는데 망사르 사후인 1710년에 완공되었으며 앵발리드의 중심에 있는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자 프랑스 [[바로크]] 양식 건축물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영향을 받은 이 건물은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7m까지 뻗은 위풍당당한 높은 돔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원형의 광장과 그것을 둘러싼 건물 등을 가진 망사르의 전체 계획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1800년 9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인 [[튀렌 자작]][* 그의 작위명을 따 흔히 튀렌, 튀렌느라고 언급되는 [[루이 14세]] 시대의 명장. 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Turenne. 1611~1675.]의 시신을 앵발리드의 돔 교회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래 [[영묘]]로서 쓰이기 시작했다. 원래 튀렌 자작의 시신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역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을 파괴한 과격한 혁명파들도 그의 시신만은 보전하기 위해 파리 식물원에 따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1808년에는 [[루이 14세]] 시기의 명장인 [[보방]](Vauban) 후작의 심장이 안치되기도 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숨을 거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신이 1840년 12월 15일에 거국적인 국장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자 이곳으로 이장하여 전용 영묘로 삼게 되어 20년이 넘는 공사 끝에 1861년 4월 2일에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이 지금처럼 안치되었다. 나폴레옹 1세의 적갈색 관은 대놓고 예배당의 주인공처럼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일반 관과는 차원이 다른 사이즈를 자랑한다. 이후 [[제롬 보나파르트]], [[조제프 보나파르트]] 등 나폴레옹 1세의 형제들과 [[페르디낭 포슈]] 등의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을 지휘한 장군들이 안장되었으며 [[라 마르세예즈]]의 작곡가이자 군인인 루제 드 릴의 시신도 1차 대전기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어 나폴레옹 가족과 프랑스의 군사적 영웅들의 영묘로서 사용되고 있다. 1940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었던 [[나폴레옹 2세]]의 시신도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사후에나마 그의 아버지와 함께하게 되었다.[* 단, 나폴레옹 2세의 심장과 창자는 아직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다. 항목 참조.]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c80fc53451d857e4af5a974c036888f.jpg|width=100%]]}}} || ||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영묘를 방문한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후 1940년 6월 28일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6월 28일 새벽 5시 30분에 파리를 방문하여 겨우 3시간 동안 머물렀는데 이것이 그가 총통 자리에 오른 후의 처음이자 마지막 파리 방문이었다. 이때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들러 말없이 나폴레옹 1세의 관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특히 앵발리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나폴레옹 2세]]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2월 18일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하라는 총통 명령 21호를 군부에 하달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 점령을 미루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한 결과 [[베를린 공방전|나폴레옹보다 더한 운명을 맞이했다]]. 비록 히틀러의 지시로 이장된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인들도 아들을 아버지 곁에 두는 것이 맞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에도 나폴레옹 2세는 여전히 파리 앵발리드 한 켠에 잠들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