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구치구미 (문단 편집) === 초대 ~ 3대 다오카 카즈오 시대까지 ===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산구조[* 야쿠자 조직 명칭에 자주 붙는 '~구미(組)'는 합법적인 회사, 그중에서도 [[곤고구미]]나 [[오오바야시구미]] 같은 건설회사로 위장하려 붙였던 것이 기원이다. 따라서 한국어로는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번역어가 없으며 간혹 어감상 '~파'로 의역한다.])는 1915년 [[고베]]의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구미쵸(두목)인 야마구치 하루키치(山口春吉)가 50명의 조직원들을 모아 오오시마구미 산하 조직으로 결성하였다. 이후 인부파견업체로 시작해서 공연 흥행 사업도 하면서 조직의 기틀을 다져갔다. 본거지가 [[고베]]인 관계로 과거 [[효고현 남부 지진|고베 대지진]] 당시 조직원을 동원해 재난 구호 활동을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1925년 2대 두목에 오른 초대의 아들 야마구치 노보루(山口登)는 1932년 말에 발발한 타이쇼 운수(大正運輸) 쟁의 같은 노사분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조직원들이 다투던 노조원들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만하게 노사쟁의를 해결하여[* 살해당한 조직원들은 야마구치 노보루의 지시에 따라 비무장 상태였으며 야마구치구미는 이들이 살해당한후에 보복도 하지 않고 조정에 전념하였다.] 야마구치구미에 큰 명성을 가저다 주었다. 이후 고베중앙도매시장 개설 당시 이권 문제로 상위 조직이던 오오시마구미와 대립해 격한 항쟁을 치른 후 독점권을 손에 쥐고 1932년 독립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두목이었던 야마구치 노보루가 요시모토 흥업 사건과 관련된 항쟁 중 칼에 찔려 1942년 사망하고 결국 야마구치구미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목 부재라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된다. 사실상 두목 부재로 인해 서서히 말라죽어가던 야마구치구미를 다시 부흥으로 이끄는데는 3대 두목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의 역할이 컸다. 전후 고전적인 바쿠토 체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야쿠자 체제를 구축한 야마구치구미는 미군정하의 단 5년 사이에 오사카 지역 대부분을 차지할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이 성장을 이룩해낸것이 바로 1946년 3대 두목에 취임한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였다. 다오카 카즈오는 1913년 [[시코쿠]]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이후 14살의 나이에 코베 가와사키 조선소에 입사하였으나 몸이 불편한 동료를 괴롭히던 현장주임을 두들겨 패고 2년 만에 퇴사한다. 그뒤 백수생활을 하던 다오카는 고등소학교 동창이자 제2대 구미쵸인 야마구치 노보루의 동생이던 히데오가 있던 야마구치구미에 입단한 이후 조직의 핵심 전투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커다란 덩치로 싸움에서 상대의 눈을 찌르는 수법으로 이름을 날려 조직에서는 다오카에게 곰이라는 별명을 지어 붙여줄 정도로 야마구치구미내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오카는 극장 경비를 서던 중 자신의 오야붕을 욕하는 극장 주인의 태도에 열받아 극장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위에서 언급된 타이쇼 운수 쟁의때도 보복금지의 방침을 어기고 단신으로 일본도로 노조 본부를 습격하는 등 여러 번의 사고를 쳤지만 그때마다 관대한 처분을 받았는데 어쩌면 야마구치 노보루가 다오카에게서 야쿠자로서의 잠재력을 보고 그를 높이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6년에 반대파 단원을 찔러 죽인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전쟁 기간 중 절반을 옥중에서 보냈는데, 덕분에 징병과 당시 야마구치 구미가 겪던 여러 거친 항쟁들을 피할 수 있었다. 1943년 석방된 시점에서는 당시 두목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사망한데다가 [[일본 제국 경찰|제국 경찰]]의 엄격한 단속으로 규모가 크게 줄어있던 야마구치 구미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 잔인한 명성으로 33명 규모의 작은 조직의 구미쵸가 된 다오카 카즈오는 이전의 야쿠자들과는 다르게 기존 사업에 기업체제를 적용해 세력확장을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말 코베 지역에서 가장 큰 바쿠토계 조직인 혼다카이와 전략동맹을 맺는다. 혼다카이는 한 때 야마구치구미와 함께 칸사이를 양분했던 조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마찬가지로 오오시마구미로부터 독립한 조직이기도하며, 당시만 해도 본거지인 코베에서는 야마구치구미보다도 규모가 컸었다. 특히 혼다카이는 오오시마구미에서 1940년 독립한 이래 고베 창고업과 항만하역업 등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보니 이 문제로 야마구치구미와 끊임없이 경쟁했고 제2차히로시마 항쟁 당시 야마무라구미를 지원하며 대리전쟁을 치르기도했다. 이후 제1차 정상작전 당시 전략 해산 하였다가 대일본평화회로 재건 이후 폭대법에 의해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되었었으나 1997년 해산을 기점으로 지정해제되었다. 혼다카이와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음을 계기로 야마구치구미는 한신 지역에 영향력을 넓힌 이래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있던 한국계 구렌타이 메이유카이 또한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로써 사실상 전후 얼마 안 가 오사카지역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다오카는 기존의 항만하역, 창고업과 마약판매[* 특히 한국산 [[히로뽕]]에 재미를 많이 본 것으로 전해진다.] [[경마/일본|경마]] 경륜 야구도박 도박장개설 등의 바쿠토 사업을 넘어 조직의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한다. 흥행업인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예능단을 조직해 전국 일주를 돌리며 노하우를 쌓아 코베예능사를 발족. 당대 최고 인기의 소속 연예인들을 무기로 메이져 방송국에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당시까지도 야쿠자의 흥행사업이란 것은 자릿세를 받고 공연의 개최를 중개하거나 연예인의 출연료를 삥땅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다오카는 연예기획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주먹구구식의 '야쿠자성'을 배제하고 전속 연예인을 파격적인 대우로 고용하고 공연전체를 기획, 관리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연예기획사를 출범시켜 성공시켰다. 특히 일본 최고의 엔카가수로 평가받는 [[미소라 히바리]]와 인연을 맺게된것도 이런 이력이 있었기때문이다. 당시까지만해도 실력은 좋았지만 예능단 가수에 머물러있던 미소라 히바리는 고베에서의 공연 이후 다오카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다오카가 미소라 히바리의 초기 성공에 여러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노무자 중개업을 바탕으로 화물 회사에 대한 재정적 관여를 통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신의 입김이 닿는 소수의 인력사무소를 제외한 경쟁 인력사무소들을 폭력과 협박으로 처리해서 인력시장에 독과점을 형성하는것이다. 이렇게되면 화물회사 입장에서는 회사를 운영하기위해 비싼 상납금을 내라고해도 거절할 수 없게된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에는 인력을 볼모로 지배된 화물회사들은 온갖 밀수사업에까지 동원되었고, 다시 인력과 밀수범죄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인질로 야마구치 구미에 더욱 꾸준히 협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60년대 중반에는 코베 부두 하역량 전체의 80%를 지배할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이 시기 한 해 동안 야마구치구미가 화물사업과 관련해서 벌어들인 액수만해도 약 60억엔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항구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과거 고베는 아시아지역의 핵심 물류창구 역할을 맡고있었기때문에 엄청난 양의 물류량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 항구도시의 화물 가운데 절반이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 60년대부터는 야마구치구미가 세력 확장 속도를 올린다. 소위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이라 불리는 세력 확장을 시도, 이때 메이유카이와의 항쟁 후 2차단체로는 승격됐지만 오사카에서 제대로 된 세력권을 확보하지 못한 [[재일교포]] 야쿠자인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에게 타지역 진출을 허용하였고 이에 한록춘의 잇신카이 등이 합세하여 활약해 야마구치구미는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이때의 일화들이 워낙 많다보니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영화가 히로시마 진출을 두고 히로시마 토착 조직인 교세이카이와 싸운 일화를 다룬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 호쿠리쿠 진출 일화를 그린 호쿠리쿠 대리전쟁 등등이 있다. 이런 야마구치구미의 팽창은 여러 조직간의 수많은 항쟁을 일으켰고, 규슈로 진출한 하카타 사건때는 조직원 300명을 일시에 동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1965년에는 심지어 히로시마 교세이카이의 주도로 두목 다오카 카즈오의 집에 다이너마이트가 투척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야마구치구미가 이렇게 일본 전국으로 진출할 때, 성공적으로 그 지역에 정착한 경우도 있지만 지역 조직의 저항으로 크게 힘을 못쓰거나 적은 영향력만 끼친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큐슈,히로시마,오키나와 등등이 야마구치구미가 제대로 진출 못한 곳이다. 큐슈는 토착 조직들이 워낙 흉폭하고 무투파로 이름 높아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키나와 역시 1978년 진출할려다가 오키나와의 조직들이 한데 모여 쿄큐류카이를 결성해 강한 저항을 반복했다보니 결국 경찰이 양측을 모두 체포,제재하여 진출을 포기하였다. 또한 히로시마의 경우처럼 한때 싸웠지만 나중에 사카즈키고토를 통해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는 있다. 1965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산하 424개 구미, 9,450명의 인수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야마구치구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조직의 연간 매상이 100억엔이 넘었으며 도박, 고리대금업, 스포츠 및 흥행업에 이르기까지 약 5,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며 이중 5억엔가량을 경찰에 상납하는 등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힘이 어느정도 감소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1984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 한 간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벌이는 말단 꼬붕들의 평균 연수입이 330만엔정도이고, 클럽지배인급이면 약 1,000만엔, 중간급 두목이면 연간 3,000만엔정도를, 대부급이면 1억엔정도를 챙겼다고 한다. 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다. [[리즈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3대 구미쵸 타오카 카즈오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운수대신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깡패|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고노 이치로는 아들이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내가관방장관, 손자가 [[고노 다로]] 현 국무대신이다. 즉 전형적인 [[정치인 가문]]이었다. 야마구치구미가 전성기를 달린 60년대는 특히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극우조직의 득세가 심각했고, 야마구치구미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런 협력의 중심에는 1960년대 초 회원 15만명규모의 극우조직 '전애회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다나카 세이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있었다. 다오카 자신은 [[코다마 요시오]]와 어느정도 협력은 하고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코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다나카 세이겐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친우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야마구치구미가 위기를 맞게된다. 19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다오카 암살시도 사건부터였다. 일본 관서 지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마구치구미였지만 여전히 그에 반하는 조직 또한 존재했다. 1975년 3대 야마구치구미 산하의 사사키구미와의 싸움에서 오야붕을 잃은 마츠다구미 산하 대일본정의단 소속 조직원 나루미 키요시가 대범하게도 야마구치구미의 영역 한복판인 교토에서 권총으로 다오카 카즈오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시도에서 다오카 카즈오는 목을 스치는 총상을 입으며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 충격으로 몇달간 두문불출하게 되면서 조직내에서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게 된다. 다오카는 "나를 노리다니..대단한 놈인데.. 하지만 본인이 살고 싶어했기 때문에 실패한거야. 죽음을 각오하고 좀 더 가까이 와서 쐈어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벨아미 나이트클럽 마담을 불러 폐를 끼쳤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벨아미에 폭력단 관계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약속했다고 한다. 벨아미 나이트클럽은 이후에도 번창했지만 80년대 중반 마담이 사망하고 폐업했다고 한다. 여하간 이렇게 발발한 <오사카 전쟁>에서 두목이 총격을 당하는 유례없는 사건이 발생하자, 와카가시라였던 야마모토 켄이치는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고 마츠다구미와 대일본정의단에 무자비한 보복을 엄명했다. 야마구치구미의 무차별 공격으로 7명의 조직원이 연달아 사살 당한 마츠다구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루미 기요시를 포박해서 야마구치구미에 넘겨주게된다.[* 이때 야마켄의 조직원으로 항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훗날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두목이 되는 이노우에 구니오이다. 징역 17년의 장기징역형을 받았고, 출소 후 그 댓가로 5대 야마구치구미의 주요 간부가 되었다.] 여담으로 암살을 시도한 '나루미 기요시'는 얼마안가 코베 근교 롯코산에서 검은 테이프에 둘둘 말려 10일 정도 부패된 시체로 발견된다. 기요시의 시신은 손, 발톱이 거의 다 뽑혀 있었고 양손 지문이 사라져 있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연일 지속되던 더운 날씨에 얼굴이 부패 백골화 되어 알아보기조차도 힘들었다. 그래서 적외선 조사로 기요시 등에 있는 흐릿한 선녀 문신을 찾아내고, 또한 소년원 시절 [[티링|성기에 박아넣었다는 2개의 진주]]도 확인함으로써 시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비디오 테이프가 전달됐는데 나루미가 무차별 고문 당하는 영상이었고, 그걸 본 다오카 카즈오는 "좋아"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마츠다구미를 궤멸시킨 야마구치구미는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 항쟁 종결을 선언했다. 마츠다구미도 오사카부경에 항쟁 종결을 알리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후 마츠다구미는 조직원들이 대거 이탈하여 결국 해산하게 된다.[* 나중에 나루미 기요시의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 "돈을 쏜 사나이"의 소재가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너무 커진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된데다가, 야마구치구미 내부에서 장년층과 청년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의 정책에 반대하는 하부 구미의 두목들이 23명이나 경찰에 잡혀가는 등 안팎으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관 1,100여명이 동원된 이른바 '80일 전투'라고 불리는 전후 사상 최대규모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단 두 달 만에 야마구치구미 간부 518명과 조직원 2,000명이 구속되었다. 오사카 전쟁을 지휘한 대가로 심지어 병보석 중이던 다오카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마저 구속된다. 결국 계속 발생하는 위기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타오카 카즈오는 60명이 넘는 신문기자들을 자신의 호화자택에 부른다. 그 자리에서 타오카 카즈오는 야마구치구미가 대중과 경찰에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굴욕적인 기자회견을 가지게 된다. 이 기자회견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완전한 은거에 들어가는데, 은거하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98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다오카 사후 야마구치구미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의 준비 끝에 커다란 영결식을 거행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경고의 의미로 전국적으로 구성원 900여명을 구속하며 대대적인 진압을 시도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오카의 영결식에 200개 조직 1,300여명의 야쿠자 조직원이 모인다. 이 영결식은 대담하게도 코베에서 가장 명성높은 변호사들 사무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졌으며 [[코다마 요시오]]를 위시한 극우 조직의 추종자들과 정치인, 타바타 요시오나 [[타카쿠라 켄]]을 포함한 일본 연예계의 스타들도 대거 참석했다. 다오카는 죽기 전 잔인한 성격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앞서의 기자회견 이후 투옥되어 있었던 켄이치는 공식적인 취임이 어려워서 상주(상주喪主)는 다오카의 아내였던 다오카 후미코가 담당하였다. 이 장면은 남성 일색의 야쿠자 세계에서 여성인 후미코가 상주라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후미코가 상주를 맡은 게 야마모토 켄이치의 출소 전까지의 임시직이긴 했지지만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기까지 여자 구미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2,000여명이 넘는 유례없는 대규모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에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건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했다. 이후 1982년 야마모토 켄이치가 출소하게 됨에 따라 다오카의 자리는 야마모토에게 넘어가지만, 얼마안가 7개월만에 야마모토는 간경변증으로 사망해버려 야마구치구미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과는 달리 곳곳의 수많은 조직들을 '[[사카즈키고토]]'로 산하 조직으로 흡수해가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내부 결속력이 약했다. 때문에 약한 결속력을 다져오던 다오카 카즈오라는 주도적 인물이 사라지자 세력 확장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