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오원위안 (문단 편집) === [[비림비공운동]] === 1973년에 접어들면서 저우언라이가 실권하자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장칭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또 잘생겨서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왕훙원을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함으로 공식적인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받으려고 했다. 야오원위안은 캉성, 장춘차오와 함께 이 작업을 원조하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1972년 12월 28일 왕훙원을 후계자로 지목했고 1973년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린 1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왕훙원]]에게 자신의 표를 대신 투표하게 하는 등 다시 문혁소조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야오원위안은 다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월 28일의 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11월,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인민대회당과 베이징의 호텔 및 공공장소들을 불건전한 예술품과 가구로 장식하게 허용했다고 마구 비난했다. 이는 [[데탕트]] 분위기에 따라 구미의 외교관과 정치인들이 베이징을 방문하게 되자 저우언라이가 외교 수단의 일환으로 그들이 방문할만한 곳을 국제적인 감각에 따라 치장한 것이는데 장칭은 이를 두고 저우언라이가 반동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때 야오원위안은 장칭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를 조직하여 베이징 시내 곳곳의 '불건전한 예술품'을 조사했고 700여 점의 예술품과 장식품을 압수한 다음에 '혁명적' 예술품으로 대체했으며 압수한 물품 중 200여점으로 흑화 전시회를 열었다. 그외에도 1973년 여름 뮤지컬 영화 <정원사의 노래>를 보고 공산당원이 아닌 정원사가 학교 선생이 되었다는 점, 노래 가사에 '문화가 없이 어떻게 우리가 혁명의 큰 책임을 더맡을 수 있나요?'란 대목을 두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1974년 1월,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현대판 공자라고 공격하면서 [[비림비공운동]]이 시작되었다. 홍기, 인민일보, 해방군보 등이 일제히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야오원위안은 1974년 4월에 1973년 10월에 있었던 [[헨리 키신저]]와의 회담에 있어서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이 우경적 오류를 범하여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회담을 벌이고 투항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맹비난하며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대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풍경호 선박 사건>을 일으켜 외국 선박을 구입하여 운송력을 증강시키려 하던 국무원의 결정을 비판하며 양노사상, 추종주의, 매판자산계급사상자들의 독재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마오쩌둥이 노쇠하자 그 뒤를 잇고자 했던 장칭의 난동으로 중국의 상황은 더욱 개판 오분전이 되었다. 장칭은 당과 군을 장악하려 했으며 방광암으로 죽어가던 저우언라이를 내쫓고 장춘차오를 총리로 삼으려 했다. 또한 덩샤오핑의 복권도 막으려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부인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더 이상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장칭은 듣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에서 분노를 터트리며 장칭,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를 묶어 사인방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비난했다. 덴마크 총리 폴 하틀링과 접견한 후 마오쩌둥으로부터 레닌이 왜 자산계급에 대해 독재를 시행해야 한다고 했는지에 관한 글을 쓰라고 주문받자 1975년 3월 1일 <홍기> 3호에 <린뱌오 반당 집단의 사회적 토대>를 게재하여 린뱌오 집단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며 심각한 사회계급적 토대가 있다고 지적, 전면적인 독재와 계속된 혁명을 주장했다. 1975년 9월에는 덩샤오핑의 [[정돈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수호전]] 필화사건을 일으켜 마오쩌둥이 수호전의 108호걸이 탐관오리만 반대하고 황제는 반대하지 않았으니 송강은 투항주의자이며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을 들먹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