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오원위안 (문단 편집) === 최후의 발악 === ||[[파일:모택동시신앞정치국원들.jpg|width=100%]]|| || 마오쩌둥의 시신 앞에 선 정치국원들. 왼쪽에서부터 장춘차오, 왕훙원, 장칭, 화궈펑, 마오위안신, 야오원위안, 천시롄, 왕둥싱. ||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4인방과 국무원 총리 대리인 [[화궈펑]], [[예젠잉]], [[샤오징광]]을 비롯한 군부가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9월 9일 마오쩌둥의 장례절차를 정하기 위해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장칭은 [[덩샤오핑]]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이 동조했다. 하지만 당 부주석인 [[예젠잉]]이 가장 필요한 것은 [[화궈펑]]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선을 제압당했고 4인방도 화국봉을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4인방은 주요 안건에 대해 자신들에게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등 화궈펑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9월 16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의 유언인 <천천히 하라, 서두를 것 없다,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서 하라>가 발표되었고 야오원위안은 즉각 국영통신사인 신화사에 전화하여 국경절 보도에서 과거의 방침에서 비추어서 하라를 '기정 방침대로 하라'로 왜곡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9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 추모대회에 참석한 야오원위안은 9월 19일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각 성과 시에서 개최되는 추도회에 대해 언급할 때, 중요하게 강조할 것이 있다면 중복되어도 상관없다. 예를 들면 '기정 방침대로 하라'이다. 이 말이 강조되어 있다면 모두 보고하고 없다면 그와 비슷한 말이라도 집어넣도록 하라." 야오원위안은 9월 20일, 23일, 30일에도 잇달아 전화해 신화사의 다짐을 받아냈다. 이로 인하여 9월 말까지 인민일보 등 6개지에서 기정 방침대로 하라란 마오쩌둥의 유언을 선전한 기사가 236개 게재되어 마오쩌둥 추도회 관련 기사의 60%를 차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