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율초재 (문단 편집) == 생애 ==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율]]씨, 즉 [[요나라]]([[거란]]) 황족 출신이다. 하지만 거란은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지배층은 대부분 한화(즉 중국화) 되었고, 마찬가지로 야율초재도 한화된 거란인이었다. 즉, 거란인이라기보다는 중국인의 정체성이 더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요나라는 1125년 [[금나라]], [[남송]]의 협공에 멸망하였고, 거란인들 다수는 금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고, 나머지는 뿔뿔히 흩어져 여러 후계국을 세웠다. 야율초재의 집안은 요나라의 황족 출신이지만 이렇게 금나라에 출사하고 있었다. 조부와 아버지는 모두 금나라의 고위 관리였고, 야율초재도 금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상서성의 하급관리로 임관했다. 1214년 금나라의 중도([[베이징]])은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야율초재는 금나라가 [[개봉]]으로 수도를 옮겨가자 중도에 남은 그는 야인이 되었는데, 야인시절 몇년간 불교를 공부했다고 한다. 1218년부터 칭기즈 칸은 그를 참모로 삼았고, 이어 1219년의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원정에도 같이 종군했다. 이 원정에서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에게 여러 계책을 냈고, 그 계책으로 몽골군은 연전전승하면서 칭기즈 칸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다. 1227년 8월 25일 칭기즈 칸이 붕어했고, 4남 [[툴루이]]가 2년간 임시 대칸을 하다가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이 때 (중국어 사료에서는) 오고타이를 대칸으로 선출되게 한 것은 야율초재의 업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의 대칸 등극을 도운 신임을 바탕으로 몽골 제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오고타이 칸 (태종) 3년, 원나라는 당나라를 모방해 중서성을 세웠고, 야율초재는 재상격인 중서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야율초재는 여러 개혁안을 냈다. 이는 모두 원사에 기록된 것이다. * 절하는 법을 확립하고 군신관계를 분명히 할 것 (確立跪禮,制訂君臣之儀) * 유교를 진흥하고 문인을 등용해 나라를 다스릴 것(興科崇儒,發展文人治國) * 학살을 자제하고, 백성과 그 재산을 보호할 것 (改變屠城傳統,著重富國保民) * 관리를 바로 임용하고, 고리대를 폐지할 것 (整頓吏治,廢除羊羔兒利[* 양고아리는 원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고금리를 말한다.]) * 천하를 공정하게 다스릴 것. (剛正不阿,以為天下表率) 오고타이칸이 붕어하고, [[귀위크 칸]]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황후 퇴레게네가 섭정을 했다. 퇴레게네는 오고타이의 충신들을 내쫓고 자신의 측근들로 몽골제국의 지도부를 구성했는데, 이때문에 야율초재는 실각했고, 그 이후 실망으로 중병에 들었다고 한다. 124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들 야율주(耶律鑄)는 [[쿠빌라이]] 칸 아래에서 재상으로 일했다. 원나라 [[원문종|문종]]은 야율초재가 원나라의 기틀을 확립한 업적을 기려 그에게 광녕왕(廣寧王)이라는 작위와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베이징에는 그의 사당이 있었으나, 명나라 시기에 원나라 청산 작업을 일환으로 파괴되었다. 이어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다시 파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