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율초재 (문단 편집) === 야율초재는 몽골인들을 교화했는가? === 야율초재가 인류를 구했다거나 지금의 중국을 있게 했다는 말은 과장이다. 그는 몽골인들의 잔악한 '풍습'을 교화하지 못했다. 야율초재가 등용된 후에도 몽골 제국은 항복한 자에게는 관용을, 저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는 기존의 원칙을 계속 유지했다. 야율초재의 주요 활동 지역인 중국의 화북 지방에서 벌어진 몽골 - 금 전쟁에서 몽골군은 이 원칙대로 항복한 지역에는 관용을 베풀고 항복한 관료와 군인들은 지위를 보장하고 그대로 임용했으며 협력한 군벌과 호족들은 세력을 인정해 주었다. 또한 몽골군은 금과의 전쟁 중에 지역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전략을 버리고 점령지에 병력을 주둔시켜 질서를 회복하고 통치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반대로 저항하는 지역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무덤의 관이 말먹이 통으로 쓰인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짓밟았다. 그래서 금이 지배한 화북 지역은 몽골과의 전쟁과 사회적 혼란, 자연재해, 전염병으로 상당히 황폐화되었다. 중국인을, 나아가 인류를 구원한 야율초재 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야율초재는 몽골 제국의 점령지 정책을 바꾸지 못했다. 또한 몽골 제국이 세금을 걷지 않았고, 칭기즈칸이 야율초재를 만나기 전에는 통치의 기술이 없었다는 윗 문단의 글은 몽골 제국에 대한 기초조차 모르는 말로서 테무진은 칸으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부족민들에게서 쿱추르를 징수해 가축을 세금으로 받았고 즉위한 해에는 행정와 세제, 칙령의 문서화를 이뤄 호적과 세금 대장, 판례를 관리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원정 때부터는 점령지에 다루가치를 파견해서 세금을 걷고 물자와 인력을 확보했다. 몽골 제국은 항복한 지역이든 초토화시킨 지역이든 다루가치를 비롯한 칸의 대리인들을 파견해 지배력을 확보하고 지역의 재건과 세금, 인력 수취에 힘쓰는 통치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호라즘 전쟁에서 초토화되었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의 재건은 칭기즈칸 당대에도 이뤄지던 일이었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역 역시 소련 시기에 이뤄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몽골 제국의 침공이 지역에 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야율초재와 가장 접점이 많은 우구데이 칸의 경우, 형제인 차가타이와 상의하여 쿱추르의 세금 제도를 정비했다. 따라서 야율초재는 몽골인들을 '교화'했다고 볼 수 없다. 굳이 '교화'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중앙아시아의 도시를 파괴하던 칭기즈칸 앞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탄원한 마흐무드 부자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들은 칭기즈칸에게 도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정복지를 재건할 것을 진언해 칭기즈칸의 동의를 얻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최초의 다루가치가 되어 지역을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이후에는 더욱 중용받아 제국의 대신으로 출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