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쿠자 (문단 편집) ==== 재일교포 야쿠자 ====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13571|시사저널에서 1994년 취재한 교포 야쿠자 이야기]]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10100022|월간조선에서 교쿠도카이 조규화를 인터뷰한 내용]]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야쿠자 수백명 기사[[https://youtu.be/0gvNUtIeogw|#]] 재일교포들은 기본적으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기에 주류 일본인보다 범죄에 빠질 위험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20세기 전반부까지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마피아, 20세기 이후의 히스패닉, 흑인 [[갱스터]]나 유럽 각국에 포진한 각종 이민자 출신의 갱단 등, 소외된 민족이 있는 나라라면 정도의 차이일뿐 항상 있는 현상이었다.]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은 주로 야쿠자 조직 내에서도 핵심적인 [[중간관리직|행동대장]]의 역할을 주로 맡아왔기에 조직 내 영향력도 크지만, 동시에 여러가지 면에서 차별을 받는 경우가 과거에는 많았다. 전후 대부분의 재일교포 폭력조직들은 구렌타이의 형태로 활동하였는데, 미군정이 물러난 이후부터는 이들이 구렌타이 조직채로 기존의 야쿠자 조직에 편입되어 조직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야쿠자 조직에 흡수되면서 초창기 야쿠자 조직간 항쟁의 최전선에서 소모품처럼 쓰였는데, 실제로 가장 야쿠자간 항쟁이 치열했던 시기 '무투파'로 유명했던 조직들에는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들이 많았다. 이후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들은 폭력이 아닌 막대한 자금원을 확보하게 되는데, 바로 [[한국]]과의 커넥션이 그것이다. 현재에 와선 아예 [[귀화]]하는 부류도 많고 아직도 그 비중은 확실히 무시 못할 정도. 야마구치구미 사상 최강의 전투군단이라 불리던 구성원 대다수가 재일 교포인 야나가와구미는 전성기에 2차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작전 당시 10대 광역폭력단에 유일하게 포함되었고 해산 당시 산하73단체 사카즈키를 한 조직원만 1,700명 가량이었다. 여기에 준구성원을 포함하면 최소 2,800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해산 이후 야마구치구미 본부로부터 절연당한 야나가와구미 초대 구미쵸인 [[야나가와 지로]](양원석)과 야나가와구미 2대 구미쵸인 다니가와 고타로(강동화)는 야마구치구미 본가의 비공식 고문 역 및 픽서로 활동했으며 야나가와구미 4천왕이라 불리던 노자와 기타로, 이시다 쇼로쿠(박태춘), 가네다 산슌(김삼준), 후지와라 테이타로가 이끌던 각 조직은 3대 야마구치구미 2차단체로 승격하였고 나중에 초대 다쿠미구미 부조장이 되는 구라모토 히로후미, 구로사와구미 부조장이었고 고쿠세이카이 초대 회장이 되는 마에다 가즈오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재일교포 조직원들은 야마구치구미 계열의 타 조직으로 흡수되어 핵심 전투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렇게 재일교포 야쿠자들이 일본 최대 야쿠자인 야마구치구미를 비롯해 각 지역 조직에서 큰 세력을 이룰 수 있던 여러 요인 중 가장 큰 요인은, 전후부터 1990년대까지 지속 되던 한일 간의 마약 커넥션과 한국 여성을 이용한 매춘에서 찾을 수 있다. 전후 미군정 통치기 미군정의 묵인하에 각 도시의 암시장을 삼국인들이 장악하던 시기 구렌타이계열 한국계 야쿠자들은 당시에도 큰 돈이 되던 [[히로뽕]][* 일본 현지에선 가쿠세이자이, 즉 각성제라 흔히 부르고 은어로는 "샤부"라고 많이 부른다.]을 한국에서 구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전쟁 기간 동안 히로뽕 제조에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이 제조기술자가 되어 대거 귀국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싼값에 순도가 높은 히로뽕의 밀조가 쉽게 이뤄질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조업을 가장한 한국 어선 등을 이용해 손쉽게 입수할 수도 있었다. 또한 재일교포 야쿠자들은 한국 여성을 이용한 매춘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다른 일본인 야쿠자들보다 자본금이 많았다. 당시 일본 버블경제때 "지나가던 개도 1만엔찰을 물고 다닌다" 할 정도로 경제성장이 있었고 일본인 매춘부들의 숫자가 적어지면서 한국 여성을 꾀어서 매춘을 시켜 돈을 벌게한 재일교포 야쿠자들이 많았다. 한국 여성들에게 여행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꼬셔 여권을 뺏고 강제로 마약까지 투약시켜 일을 시키며 불법이라는 것에 의해 일본인들에게 폭행까지 당하고 말을 잘 안 들을시에는 일부러 경찰에 단속되게 하여 가지고 있는 소지금도 모두 강탈되게 하고 강제 출국시킨다. 특히 최근에는 야쿠자를 멀리하자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여 키타 큐슈에 유명한 쿠도카이(工藤会)의 회장이 사형선고를 받았듯이 야쿠자가 연계되어도 불법 성매매에 철퇴를 내리고 있고 일본에서 경찰에 이송되는 경우에는 한국과는 다르게 얼굴이 기자들로 인해 공개되기 때문에 성매매 한국 여성들이 이러한 일본 실정을 모르고 피해를 입고 있다. 즉 재일교포 야쿠자는 한국과 연관된 사업을 해서 성공한 케이스이며 어떻게 보면 같은 한국인을 이용하여 일본에서 돈을 번 매국노적인 행동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재일교포 야쿠자가 많아서 한국이 실질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간혹 일본 현지의 [[넷 우익]]들 중에는 일부 조직들이 조총련을 통해 대북송금을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기도 하나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약 유통으로 목돈을 만지기 시작한 재일교포 야쿠자들은, 이후 깡패들의 전통적인 돈벌이인 마약[* 히로뽕 유통. 2000년 기점으로 히로뽕 밀수루트가 중국과 북한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각성제관리법 위반으로 검거된 외국인 중 한국국적이 40% 정도를 꾸준히 차지한다.], 도박[* 빠칭코 운영, 보호비 갈취, 경품교환소 운영.], 매춘, 흥행[* 연예흥행사업 및 연예기획사 운영, 프로레슬링, 야구, 권투, 스모 등의 스포츠 도박 및 흥행 사업.(야쿠자를 은퇴한 양원석은 일본 IBF 초대 커미셔너로 활약하며 일본 복싱계에 큰 영향력을 끼쳤고 연예계에선 [[미소라 히바리]], [[사이조 히데키]] 등과 스포츠계에선 [[역도산]], [[타카노하나]], [[장훈(야구선수)|장훈]] 등의 수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두각을 내며 서로에게 시너지효과를 가져왔다.)], 정치[* 전후부터 1960, 70년대 안보투쟁시기까지 북한의 일본 거점이었던 [[조총련]]을 향한 백색테러, 민단장악.] 산업 대부분을 하나둘 차지해 가며 엄청난 자금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는 각 조직의 결속 강화 확대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야쿠자 세계에서 높아져가는 위상을 이용해 한일협정 시에는 [[정건영]]의 [[토우세이카이]]를 필두로 한일 양국의 정보원 및 브로커로써 큰 활약을 해가며 [[부관페리]] 사업권 등 한일간 진행되던 사업 이권들을 얻어내며 야쿠자 세계에서 더욱더 강력한 지위를 얻는 계기가 되었고 역대 한국 군사정권과는 [[김대중 납치 사건]] 개입, [[조총련]]에 대한 탄압 등 [[중앙정보부]], [[보안사]]와 협력하면서 우익 [[반공]]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신뢰를 쌓아 대한민국 훈장을 받는 재일 야쿠자들도 나왔다. 1960~70년대 일본 내 스포츠행사에 참가한 한국 국가대표팀의 체재 비용 지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등의 대형 국가행사에 자금원조 및 각종 장학재단에 기부 등으로 훈장의 명분은 만들었다. 또 한국의 [[조직폭력단]]과 결의형제를 맺고 한국 조직들과 같이 사업을 하면서 우호적인 연대를 다졌다. 한국의 [[사채]] 시장 진출이나 호텔 관광, 스포츠 공연 사업, 카지노 관련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고 야쿠자의 사업 노하우를 한국 조폭에게 전수하는 등 한-일 양국 폭력단의 우호관계는 뿌리 깊다. 자금력이 권력이 되는 것은 야쿠자 세계에도 변함이 없어 자금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재일교포 야쿠자들이 각 조직의 최상층부를 차지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 일례로 오사카에서 대형 캬바레를 운영하던 한록춘은 다오카 가즈오에게 거액을 상납하고 그 댓가로 샤테이 사카즈키를 받아 후지카이를 결성해 야쿠자 생활을 시작, 야마구치구미가 [[오사카]]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 재일교포 구렌타이계 야쿠자인 메이유카이와의 항쟁 후 해산한 메이유카이 조직을 거의 그대로 흡수하며 오사카에서 야나가와구미와 더불어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메이유카이 사건 당시 24명이 구속되는 큰 희생을 해가며 활약한 야나가와구미는 당시의 활약을 인정받아 야마구치구미의 2차단체로 승격하며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진다. 현재 후지카이에서 개칭된 잇신카이의 초대 오야붕이었던 한록춘은 꾸준히 야마구치구미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14년 공개된 재산만 한화 1조 5천억 원 정도로 추정되는 오사카 중심부 [[도톤보리]] 등지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거품경제 형성 시기 경제 야쿠자로 조직의 변모를 꾀하던 각 조직들은 [[허영중]] 등을 포함한 한국계 야쿠자들에게 의지를 많이 하였고[* 전후 상당기간 제도권 금융 대출이 힘들던 대다수의 재일교포들의 사채이용률은 높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배경으로 일본 사채 및 부동산 시장에서 재일교포 큰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자금확보 및 사채회수에 한국계 야쿠자들이 많이 이용되어 왔기에 총회꾼, 불법대출, 주가조작, 한일 커넥션을 통한 자금세탁에 활용되기에도 유리하였다.] 이런 변화 속에 다카야마 기요시 등의 한국계 야쿠자들은 또 다른 재력을 손에 넣으며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22638&ref=kko|야쿠자 리세션]]의 첨병역할을 하였다. 일본에서 거품경제가 꺼지고 한국에서 [[10.13 특별선언|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 1990년대 이후 한국산 히로뽕 밀조가 정부의 단속으로 거의 사라진 후로는 한국계 야쿠자들은 일본 시중은행들의 저금리 대출과 오랜기간 구축해온 한일정재계와의 인맥을 통해 한국 사채 시장에 침투했다. 폭대법에 의해 지정된 22개의 지정 폭력단 중 2016년경 5개의 조직이 한국계가 오야붕으로 있으며 과거 오야붕이었던 경우까지 합치면 절반에 가까운 9개의 지정폭력단이 재일교포계가 오야붕으로서 관계가 있다. 관동지역 지정폭력단 5개 중 스미요시카이를 제외한 마쓰바카이, 교쿠토카이, 소아이카이, 이나가와카이는 한국계가 오야붕이었거나 현재 오야붕이고, [[규슈]] 지역 야쿠자조직은 김인순의 후쿠하쿠카이와 박정호[* 도진카이에서 회장 승계문제로 갈라져 나와 야쿠자 항쟁에 유래없을 중화기들을 동원해 항쟁을 벌였던 재일교포계 조직인 규슈 세이도카이의 2대 가이쵸였으며 항쟁 후 해산하였다가 나미카와무쓰미카이로 재결성해 개칭한 나미카와카이의 회장.]의 나미카와카이를 비롯해 전통적으로 재일교포세가 강하며, 간사이의 오사카 교토 주고쿠의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주부의 나고야 역시 재일교포세가 막강하다. 덧붙여 6대 야마구치구미 내 최대파벌 고도카이 핵심에도 재일교포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2015년 야마구치구미와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분열은 6대째가 되며 조직 넘버2인 와카가시라,[* 고도카이 총재 다카야마 기요시.] 넘버3인 통괄위원장,[* 교쿠신렌고카이 회장 하시모토 히로후미(강홍문). 3대 야마켄구미 와카가시라였고 2003년부터 3대 야마켄구미 조장대행을 하며 실질적으로 야마켄구미를 이끌던 강홍문은 2005년 야마켄구미 4대 구미쵸가 이노우에 구니오로 승계될 당시 자신의 교쿠신렌고카이를 이끌고 야마구치구미 2차단체로 독립 직계 단체로 승격한다.(야마켄구미 산하단체였을 당시에도 웬만한 직계단체 보다 큰 세력을 가진 무투파 유력 단체였다.) 2015년 4대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 고베 야마구치구미를 구성해 6대 야마구치구미를 독립할 당시 강홍문은 야쿠자 은퇴를 고려하였으나 6대 야마구치구미 구미초인 쓰카사 시노부의 회유와 압력에 야마켄구미와 거리를 두게되고 고베야마구치 구미 분열에 가담하지 않게된다. 쿄쿠신렌고카이는 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독보적인 연예계 커넥션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기간 일본 최대 게닌 사무소인 [[요시모토 흥업]]을 비롯, 연예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시마다 신스케]]의 은퇴 역시 깊은 관련이 있다.] 넘버4인 총본부장[* 오하라구미 구미초 오하라 히로노부(윤광희). 초대 다쿠미구미 샤테이카시라보좌 및 본부장이었다. 1989년 타쿠미 마사루가 5대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 취임 시 독립 직계단체로 승격한다. 항쟁에 적극적으로 앞장 섰던 무투파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분열사태에 타쿠미구미와 입장을 달리 했다.] 등의 핵심요직에 집권하며 조직 내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나고야계 야쿠자조직들의 기존 파벌들에 대한 차별이 3대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 5대 야마구치구미 구미초를 배출하며 야마구치구미의 적통이라 자부하던 야마켄구미를 포함한 다쿠미구미 등 기존 고베계 파벌들의 응집 및 반발이 원인이 되었다는 추정마저 존재한다. 고베 야마구치구미 간부 요직과 산하의 야마켄구미와 타쿠미구미 이케다구미 마사키구미 등 역시 내부를 들여다보면 예전에 해산된 야나가와구미 출신들 및 한국계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와 대비해 2011년 일본 경시청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 일본내 야쿠자의 98.5% 정도가 일본 국적이며 한국 국적 및 [[조선적]][* 조선적은 북한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서 대한민국 국적 또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선택하지 않은 식민지 전 조선국적을 뜻한다. 대부분 [[조총련]] 계열활동을 한다.]은 1.5% 이하라고 한다. 재일교포 출신 야쿠자들이 많다고는 하나 애당초 위에도 언급되었듯 야쿠자 조직들 내에서는 [[부라쿠민]] 출신의 조직원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많았으며 재일교포 출신이라 해도 부인은 일본 여성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 후손들은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며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또한 여기에는 조직의 간부급을 제외한 행동대원 급의 재일교포계 야쿠자의 상당수가 이미 은퇴 및 귀화를 한 영향이 크며 신규로 유입되는 재일교포계 야쿠자는 이미 일본으로 귀화해버린 케이스가 대부분이고 재일교포의 일본 내 위상이 상승하며 더 이상 범죄에 가담하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