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훼/논란 (문단 편집) ==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견해 == 야훼에 대한 정통주의자들의 설명은 보편적인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와 신약성경이 말끝마다 사랑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탓에 비종교인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 조차도 야훼를 '인간에게 매우 인자하신 할아버지' 또는 '인간을 조용히 바라보는 자연' 정도로 인식하지만 '''유대인들과 성경이 일관적으로 서술하는 야훼는 [[폭군|극도로 공포스러운 절대신이다.]]'''[* 구약에서 끝없이 등장하는 바로 이 공포스러운 야훼의 모습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릴적에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교육받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마니교]]에 투신했다.] 야훼는 인간과 달리 완전히 공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질서를 벗어나는 털끝만큼의 죄악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악이란 야훼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난 추악하고 어그러진 모습 그 자체이므로, 창조주인 야훼 입장에서는 이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에 대한 야훼의 심판은 정확하고 철저하며 무자비하다. 그야말로 잘못 구워진 도자기를 가차없이 깨버리는 고집불통인 [[완벽주의]]와 [[편집증]]적 정신병자 도공이라 볼 수 있다. 즉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하여 무조건 심판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 가장 죄에 대한 경각심을 많이 기를 수 있도록, 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직접 또는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사람들을 심판한 것이다. 한글 성경으로는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지만, 킹 제임스 성경은 신약의 고린도후서를 번역하면서 이 야훼의 심판에 대한 묘사장면에 '''[[테러]]'''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야훼가 집행하는 공의의 심판은 원래 그 속성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테러]]로 표현 할 수 밖에 없을 정로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며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 말 그대로 [[대재앙]]인 것이다. 어린아이나 약자라고 봐주는 것이 없으며, 선행으로 죄악을 덮거나 용서도 없다. 야훼의 저울추는 인간 기준에서 인식하는 죄의 경중과 전혀 다르다. 모든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본질은 야훼에 대한 반역이므로 죄인은 반드시 그의 생명으로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을 품은 것까지도 실제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과 동일하게 간주하게 된다. 결국 털어서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는 사람은 영원한 불지옥을 면할 수 없다.[* 교리적으로 미숙한 신자들의 경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지옥에 가게 되었으며 예수를 믿으면 이 원죄가 사해져서 천국에 가게되고 그 이후에 자기 의지로 짓는 자범죄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개별적인 회개로 용서받으며]] 이것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란 '본래적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여기서 설명하는 '''야훼에게 반역하는 성질'''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내면에 본성으로써 자리잡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의인 -야훼에 대한 반역을 단 한 번도, 전혀, 절대로 하지 않는 피조물- 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유전자에 죄성이 심겼다고 보는 것은 사무르 학파의 간접전가설로써 정통주의 입장인 언약적 대표설과는 다르다. 아담이 모든 인간의 대표이기 때문에 아담의 선택이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야훼의 행동들은 모두 이러한 야훼의 속성에서 나오는 심판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따라나오게 된다. 1. 이런 야훼의 무자비한 심판의 칼날 앞에서 어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온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예수]] 외에는 없다. 2. 그렇게나 완벽하게 공의로운 야훼가 존재한다면 왜 죄를 짓고 멀쩡하게 사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이 세상에 어떻게 죄나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 그것은 야훼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심판을 시작하면 인간의 눈에는 야만스럽게 보일정도로 무자비한 야훼이지만, 그 심판을 웬만하면 참는다. 완벽하게 공의로운 존재인 야훼가 인간의 죄악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하지만 야훼는 인간들은 발휘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끓어오르는 의분을 거의 무한하게 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훼의 인내와 성품은 인류를 물로 심판했는데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살려둔 것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결국 고레스왕의 자비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게 바로 느헤미야서와 에스라서이다)까지 성경에 셀 수 없이 묘사된다. 3. 아무리 공의롭다지만 이렇게 무자비한 야훼라면 [[예수]]가 야훼를 사랑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 바로 야훼의 이 무시무시한 공의 위에서 기독교의 빛나는 대속 교리가 탄생한다. 지금까지 보였던 야훼의 공의의 속성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야훼는 인간을 사랑한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수양아들로 입양하여 인간으로써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자신의 신적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하나 없는 공의를 원하는 야훼의 완전함과 매 순간 쉴새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적 부패성 때문에 공의와 사랑이라는 야훼의 의지는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야훼는 공의와 사랑을 완벽히 충족시킬 방법을 창세 이전부터 계획해 놓았다. 그것은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자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저질렀던, 또 앞으로 저지를 모든 죄악에 대한 야훼의 진노의 심판을 대신해서 받는 방법'이다. 그래서 성자가 야훼의 심판을 받기 이전에 태어난 인간들은 성자가 대신 받게될 심판을 상징하는 '순전한 동물을 처형하는 모형'(희생제사)을 통해 성자의 대속을 받았으며 성자가 야훼의 심판을 받은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성자의 대속 사건(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대속을 받는다. 처형모형은 육체적 혈통에 의하여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 속에서만 계승었지만 성자의 대속 이후에는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민족적 혈통(유대인)의 제약을 벗어나게 된다. [[개혁주의#s-2|칼빈주의]]로 대표되는 정통주의자들은 '''성자의 대속에 대한 믿음의 발생 자체가 야훼의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당신이 이 대속사건이 믿어진다면 그 이유는 야훼가 당신에게 믿어지는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고 이는 야훼가 당신을 구원하기로 선택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야훼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안 믿긴다면 슬프지만 선택 못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예수가 바라면 주고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는다고 했으니까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도 있다. 이를 알미니안 주의라고도 한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개신교계 떡밥인데, [[장 칼뱅]] 문서 참고.][* 웨슬리안과 칼빈주의 모두 성경에 부합한다. 성자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면서 보여준 첫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는 전혀 다른 원소로 구성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야훼의 씨인 알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상징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표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야훼로부터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받은 야훼로 부터 받은 사랑을 똑같이(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에 참예시키기 원하여 그들의 죄를 성자에게 전가하고 처형을 집행한 야훼처럼 이웃의 허물로 인한 대가를 자신이 대신 치르어 주는 사랑을 베푸는 것) 실천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 야훼의 무차별적인 공의는 영원불변의 속성이다. 신약은 현존하는 지구를 포함한 이 모든 세상이 마지막 날에 '''"남김없이 모두 불살라버리기 위하여 예비되었다"'''고 진술한다. 구약의 야훼가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대학살은 피학살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야훼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할 때 어린아이나 노약자라는 이유로 유황불의 재앙을 전혀 피할 수 없었듯이 어린이나 노약자라고 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심판의 개념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현대의 정통주의 기독교에서는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야훼 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이는 것은 신약시대 이후로는 야훼가 심판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나타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적 진술도 야훼의 죄악에 대한 일관적인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신자들이 동성애자를 탄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야훼가 이미 죄에 대한 심판의 연기를 선언했는데 인간이 감히 상대방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대단한 월권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위에 설명한 대로 예수를 제외한 단 한 명의 인간도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즉 죄를 계속 지었고 짓고 있고 앞으로도 지을 인간으로서는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때문에 동성애자라도 자신의 동성애가 죄라고 인식하고, 기독교인으로서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예수가 그런 동성애적 죄에 대한 대가까지도 다 지불하고 대신 죽었다는것을 믿는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0은 아니다.][* 근본주의 교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면 동성애자, 자살한 사람 등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말도 안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펠라기우스|구원의 행위-믿음 논쟁]]은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와 같이 해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소아성애, 간통, 수간, 근친상간, 의미없는 학살, 우상숭배, 동성애, 고아와 과부, 이방 나그네, 거지, 장애인에 대한 차별, 불의를 행하는 것을 죄라고 보는 야훼의 시각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훼]]의 공의를 근거로 타 종교인들과 마치 원수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이 결코 근본주의 전체의 입장은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당장 본 항목에서 서술한 근본주의 신학의 교리인 사랑의 의무에도 어긋난다. 칼빈의 5대 교리에서조차 <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며 야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천명하지만 이들 역시 전술한 사랑의 의무의 실천 대상이다. 하지만 교리와 다르게 마치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취급하던 구약의 유대인처럼 타 종교를 무조건 비방하고 적대시하는 근본주의 성직자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행태는 주로 북미 네오콘 계열의 Kingdom Now 신학 쪽에서 나타난다. 주로 말세에 유대인들이 다시 부흥하고 무너진 성전이 [[예루살렘]]에 재건되면 종말이 온다는 시오니즘적 종말론을 믿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에서 이원론은 이미 교부시대에 배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계관은 마치 야훼와 사탄이 현 세상을 두고 권력싸움을 하고있다는 [[조로아스터교]]식 이원론에 가깝다. 그리고 호전적 성향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이들은 신앙의 목적이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신국[* 또는 천국, 하나님나라]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국내 유수 근본주의 교단들에서는 Kingdom Now 신학을 [[신사도 운동]]이라며 이단시하지만, 정작 그 신학교의 교수들은 대부분 신사도운동과 동일하게 신앙의 목적이 현세에 신국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왜 이들의 지향점이 동일하냐 하면, Kingdom Now의 뿌리는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하나님나라 신학과 동일하게 카이퍼의 영역주권 이론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신학]]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Kingdom Now 계열처럼 될 수 밖에 없다. 이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야훼의 주권과 통치를 온 땅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야훼의 영광만을 논할 뿐, 야훼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 세상을 굳이 수고롭게 창조하고 또 비할 수 없이 고귀한 독생자를 희생해 가면서 까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전해준 <내 생명과 맞바꿔야만 하는 이웃사랑의 의무에 대한 의미와 그 깊이>에 대해서는 어떤 신학자도 고민하지 않는다.[* LEE AMOS JOHN, 세일즈맨으로 오신 예수님 :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복음,반석위에서 완성된 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 창조와지식, 2023, p.7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