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약탈 (문단 편집) === 고대 === 고대 전쟁에서 공격군의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는 포상과 같았다. 패자에게서 식량과 금품, 여자 등을 빼앗는 것은 정복자가 자신의 군대의 사기를 올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허가하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강하게 저항했거나 배신했던 상대국가를 약탈하여 본보기를 보여주고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군사적이거나 정치적 이유를 제쳐놓더라도 약탈이 성행한 이유는 생각보다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한다. 어느 시대건 가장 흔한 형태인 징집병들은 자신의 장비와 보급품은 모든걸 자신의 사비로 충당해서 구해야 했으며, 상비군에게는 전장 상황에 따라 월급이 아예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설령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더라도 고대부터 전쟁시 사용되는 보급과 장비들을 병사들이 사비로 재보충하거나 공동구매를 하면서 비용을 지불하다보니 공제 되는게 많아서 최종적으로 '''군인 급여 실수령액이 결과적으로 0원인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대 시대에 가장 체계적으로 봉급을 받았던 [[로마군]]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병사들이 받는 봉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로마군 병사들은 모든 무기와 장비를 일일이 자기 돈을 주고 사서 써야 했기 때문에 더욱 돈에 쪼들렸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평상시에 로마군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들한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동료들한테도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자주 하였다. 국가는 점령지 영향력과 적대국, 중립국들의 압박을 위해, 병사들은 급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이 '''일치하면서''', 덕분에 고대 전쟁에서 부터 약탈은 일상에 가까웠다. 고대 [[로마군]]의 예를 봐도 도시를 점령할 경우 상대가 알아서 항복하지 않는다면(로마군의 관용구로는 '공성구가 성에 닿기 이전에') 점령 후 약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전에서도 로마군은 아예 체계적인 약탈물 수집과 분배 시스템까지 운영을 했고, 군단병 개개인에게도 약탈은 중요한 부수입이었다.(Goldsworthy, 2000) 서양뿐이 아니라 한국 삼국시대의 전쟁기록만 봐도 약탈과 포로 획득 기사가 수도 없이 나온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은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로마를 지키기 위해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병사를 모았는데 이 [[해방노예]]들에게 스틸리코가 제의한 조건은 군대에 지원하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크게 보상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지켜 [[라다가스트#s-2|라다가스트]]와 싸우는 데 공을 세운 해방노예 중 자신의 노예를 산 자도 나왔는데, 당시는 라다가스트의 부족을 포로로 많이 잡아 노예 시세가 폭락한 상황이었다. 특히, __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군대에게 희생을 무시하고 '닥치고 돌격'을 명령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경우__ 약탈은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무리 전근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잦은 전란에 노출되어 살아왔다고는 해도 단 한 방에 자신을 죽여 버릴 수도 있는 투창, 화살에 총포탄까지 날아오는 적진을 향해 [[어택땅]]으로 달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공포스럽고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너희는 이 돌격만 성공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심리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 전쟁에서 약탈은 그저 단순히 물건을 뺏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해소 및 평소의 욕구불만을 한번에 해소하기 위해 일단 도시를 함락시킨 병사들이 도시 안으로 쳐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대로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더러는 소년)들은 죄다 겁탈하고 납치한다는 식의 잔인한 대량학살과 강간 같은 폭력이 마구잡이로 벌어졌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같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들을 보면,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영웅들의 입을 통해 그런 약탈의 끔찍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아가멤논]]이여,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는 겁니까? 그대의 막사에는 노획물인 청동기가 가득 차고,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누구보다 더 먼저 아름다운 여인만 골라 가졌으면서 아직도 황금에 탐이 납니까? 우리가 사로잡은 자식을 찾으려고 트로이인 부모들이 가지고 온 보석에 욕심이 납니까? 아니면 젊은 처녀를 또 독차지하고픈 생각이 납니까? (중략) [[트로이]]에서 떠난 이후, 우리 배는 순풍에 이끌려 처음으로 이스마로스에 닿았다. '''우리는 이 도시를 점령하여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여자들은 다른 많은 전리품들과 함께 배에다가 실었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도시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87~188쪽] 그러나 고대에도 예외적으로 약탈을 철저히 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였다. 민간인 약탈에 대해 현실적인 장애물의 예를 들자면 그 땅을 점령해 장기간 복속시킬 계획이라면 당연히 점령지 거주민들의 환심을 사야 향후 행정구역으로 편입할 때 마찰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체급을 키우고 국민의 숫자를 증가시키며 국부를 증대하여 군대를 늘릴 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서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한 상대에게 약탈로 되갚아줄 경우, 그 약탈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면 향후 약탈당한 지역은 물론이고 점령해야 할 다른 지역들까지 항복하는 대신, 너 죽고 나 죽자식의 결사항전을 끝까지 선택하므로 점령 과정에서 피해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속전속결을 해도 모자란 판국에 저렇게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시간, 비용, 물자, 병력, 사기의 손해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패배하기 딱 좋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약탈을 자제했다. 더구나 약탈당한 지역은 물론이고 그 지역과 협력하는 국가들까지 반감을 가지게 되어 복수를 위해 힘을 합쳐서 저항하며 약탈했던 군대의 보급로를 끊거나 기습, 뒷치기 등을 시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꿔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다. 물론 약탈을 시전하고 지나간 군대가 결국 싸움에서 지고 패잔병들은 약탈했던 지역을 거쳐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상태라면 어떤 꼴을 당할지 더 이상 설명을 생략한다. 이걸 못해서 난리 난 사례가 [[오(춘추시대)|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를 이끌고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를 공격할 때, 수도 영을 함락시킨 뒤 대규모의 방화, 약탈, 강간이 이루어졌다.([[복수귀]] [[오자서]]의 의중도 작용했다.) 이것이 초나라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결국 오나라는 초나라에서 물러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태종(당)|당 태종]]이 [[고구려-당 전쟁]] 당시 백암성을 공격할 때, [[백암성]]이 태도를 번복하다가 마침내 항복하니, 당 태종이 약탈을 허락했다가 금지하였고, 이에 [[이세적]]이 당 태종에게 항의하자 당 태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병력을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할 수 없는 바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짐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장군은 이 한 성을 속죄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645년) 단순하게 지나가는 곳이라 해도 그 지역으로 나중에 다시 돌아오거나 전략상 장기간 주둔할 수도 있는데, 현지인들이 약탈을 겁내서 다 도망갔거나 비협조적일 경우 말 그대로 황무지에 고립된 꼴이 나서 매우 힘들어진다. 최악의 경우 그 지역사정에 통달한 현지인들이 매우 적대적으로 돌변해 [[게릴라]] 등이 되어 뒤통수를 치거나 적군에 협력하면 더욱 심각한 애로사항들이 쏟아진다. 거기에다가 약탈 자체에도 무리가 있는게 민간인들이 비축하고 있는 물자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한 수준이므로 군대입장에서는 한줌도 안되는 적은 양이다. 그러므로 보급을 약탈로'''만''' 충당한다면 몇 개 마을을 터는 것으로는 부족하게 되므로 멀리까지가서 털어와야하며 넓은 지역을 약탈하기 위해 약탈부대가 잘게 나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약탈을 하면 할 수록 '''각개격파'''되기 딱 좋은 배치가 된다는 것. 그래서 고대에도 현지조달이 보급의 주력이었지만 수송도 병행하고 현지조달시에도 약탈보다는 일단 [[물물교환]]을 하거나 [[화폐]]를 지불해서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사는 방법, 즉 주민들이 웬만해서는 순순히 넘기도록 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물론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약탈을 시행했으며, 전세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처럼 후환이 별로 없을 것 같은 경우에는 약탈이 자주 자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