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약현성당 (문단 편집) == 건축적 의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akhyeontopsmall.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h01.jpg |width=100%]]}}} || || {{{#fff ''' 약현성당 종탑 '''}}} || {{{#fff ''' 외부 '''}}}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h02.jpg |width=100%]]}}} || ||<-2> {{{#fff ''' 내부 '''}}} ||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명동성당]] 짓기 전, 첫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지어보는 경험이 되었다. 이유는 [[고딕 양식]] 건축물을 지어본 적 없는 [[한국]]의 인부, [[중국]]에서 수입해 온 서양식 벽돌 및 기타 자재 등으로 한반도에 고딕양식 건축물을 지어본 사례가 전무했기 때문에 약현성당을 지으며 많은 도전적 시도란 것. 실제 [[고딕 양식]]의 건축은 건축가와 인부의 호흡도 중요하고 건축 자체가 어려운 경향이 있다. 약현성당의 경험이 있음에도 규모가 더 큰 [[명동성당]]을 지을 때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인부가 사망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고딕양식 건축물 짓기는 어렵고 까다롭다.[* [[고딕 양식]]은 다른 건축 양식과 달리 건축물 하중을 역산하여 설계해야 한다. 보통의 건축물은 지면에서부터 튼튼하게 계산하여 천정을 떠받히는 식으로 설계하지만, 반대로 [[고딕 양식]]은 특성상 건축 시작 때 존재하지 않는 천정의 하중을 고려한 밑단을 설계·시공하는 식. 그렇기에 도면을 그리는 건축가도 굉장히 노련해야 하며, 시공 인부들도 대략적인 개념 숙지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약현성당 건축 경험은 바로 이어진 [[명동성당]] 건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어 1905년에는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였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아래 항목에 나온 바와 같이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성식을 거행했다.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은 1991년에는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서소문 공원 안에 1984년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철거 당한 [[순교자]] 현양탑을 새로 제작하여 세웠다. 2009년 9월 13일에는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A8m0Uq3yovg)]}}} || || {{{#fff ''' 약현성당의 건축과 역사적 의의 (tbs 〈시민의 방송〉 제작) '''}}}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