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공주 (문단 편집) == 배경 == 6.25 전쟁 이후 1950년대에 생계를 위해 직업을 찾던 여성들 중 상당수가 [[인신매매]]와 직업소개, 사기 등으로 유입되었다. 정부가 주한미군을 위해 만든 위안부의 성격과 강제성이 짙었기에 원칙적으로 피해자들이 주체적 성매매의 당사자라고 할 수 없다.[* 과거 MBC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인 '꼭 한번 만나고 싶다'에는 '''13살'''이라는 나이에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는 사람에게 취업사기를 당해 기지촌에 팔려갔던 여성이 출연해서 어릴 적 생이별했던 동생들을 찾기도 했다.] 정부는 이들이 주한미군을 접대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영어 회화를 가르치고 [[성병]] 관리를 조직적으로 했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전쟁 [[고아]]나 빈민이 대다수였으며 자기 딸을 성매매로 내몬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렇게 이승만 정부부터 암암리에 성장해 오던 기지촌 성매매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정부까지 연관된 사업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은 윤락방지법을 통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했으나 그 다음 해에 곧바로 <특별구역>이라는 예외를 적용했는데 기지촌 인근 구역이 이 특별구역에 해당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부역자들이 이 성매매 사업의 이권에 많이 끼어들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69년 미군 제8전술전투비행단이 주둔한 [[군산시|군산]]에 만들어진 아메리칸 타운이다.[* 이곳은 기지촌 유흥구역 중에서도 최대규모를 자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달러 수익을 벌어들였기 때문에 정부기관이 직접 나서서 수많은 편의를 봐주기도했다.] 아메리카 타운은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변을 도운 백태하 대령이 주식회사 옥구라는 회사를 설립한 후 이 회사를 통해 만든 곳인데 아메리카 타운은 설립 과정에서부터 지방행정기관의 편의를 통해 유례없이 빠르게 기지촌 유흥가를 형성했고 기지촌의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포함한 온갖 유흥거리로 막대한 달러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이 수익이 얼마나 컸던지 대통령부터 시작해 지방의 시장 등 고위직의 관료들이 직접 나서서 이곳을 운영하는 포주들을 외화벌이 유공자로 미화하면서 표창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군사정권의 비호 아래에서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을 이용해 사업을 벌이던 사업주들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한 데다 민주화 이후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면서 한국인 여성들을 줄이고 동남아 여성들로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 성매매 여성들이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